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성내리 노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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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55회 작성일 2018-03-0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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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돈 (남, 98세, 양양읍 성내리)
■ 면담일 : 201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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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하는 친구 안내하고 2년형을 받고 이송 도중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다.


고향은 손양면 상왕도리였다. 일본 보국대에 끌려갔다 돌아와서 우차로 물건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는데 친구가 월남하는 것을 도와 달라 하여 안내하고 오니 누가 고발하여 내무서에 끌려갔다. 나는 월남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안내한 것이 들통이 나서 월남 방조죄에 해당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 갇혔다.
1950년 10월 어느 날 6개월에서 1년 남은 죄수들을 2층 교화회관에 모이라고 하여 나가보니 전국 청원자 궐기대회를 한다고 하며 죄수들이 약150명이 모였는데 형무소장이 “동지 여러분!”하고 크게 외쳐대니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기차에 태워 어디로 가고 있었는데, 인민군들은 전쟁에서 유엔군에 밀리자 후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중공군이 북한을 도우려 나온 걸 알고 있었고, 우리가 러시아로 간다고 수근 거렸다. 서하문을 지나서 기관차가 불이 환하게 밝히고 있는데 언덕을 지날 때가 되자 나는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내렸다. 옷은 죄수복에 신발도 없이 맨발이었으나 잡혀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아픈 줄도 모르고 내려뛰었다.



◆ 옥수수 가리 속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


가을이라 콩밭을 지나는데 콩이 여물어 콩꼬투리가 발등을 찔렀다. 그런데 어떤 보따리가 밭가에 있어 열어보니 옷가지들이 들어있어 그걸 입었다.
10월이지만 밤이면 추워서 옥수수를 수확하고 모아둔 옥수수가리 속에 들어가 잠을 자고, 낮에는 솔밭에 숨어서 밖의 정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흘 동안 숨어있다 남쪽으로 오려고 오노리 산에서 내려오는데 지프차가 다니면 산속에서 내려오라고 방송을 하므로 그 소리를 듣고 107헌병대에 찾아가니 그간 고생했다며 밥을 주었다. 그동안 며칠을 굶고 또 조금씩 먹다가 잘 먹으니 설사가 많이 났다.
먼저 내가 수감되어있던 항흥 형무소에 인도되어 가니 감옥 마다 인민군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총이나 폭탄에 맞아 다리가 떨어져 나간 포로, 총에 맞아 치료를 못 받아 살이 썩어가는 인민군도 있었다.

거기서 인민군들은 미군에게 밀려 후퇴하면서 형무소 인들을 함흥 뒷산으로 끌고 가서 죽인 사람들을 구덩이를 파고 묻었는데 머리는 밖으로 나오게 10명씩 철사 줄로 묶어서 묻었는데 죽은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놓고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 미군에 포로가 되었다.


고원은 원산에서 160리 정도 되는데 걸어서 내려왔다. 오면서 미군에게 영어로 사인이 있는 증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원산을 거쳐 그 증명서를 들고 비를 맞으며 안변, 협곡에 도착해서 헌병대에 갔더니 기관총을 맨 사람이 훈시를 하고 있다. 방에 들어가니 어떤 사람은 자고 다른 사람은 총을 닦고 있던 그 중 한사람이“어 형님이 아닙니까.”한다.
나는 여기서 운명적으로 수산리 장병길을 만났다. 트럭을 타고 고저에 가니 유엔군 천막이 수도 없이 처 있고 미군이 총을 메고 포위하고 있다.
지프차가 오더니 피란민을 따로 군인 따로 세운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나서 통천으로 갔는데 거기는 이미 남은 집이 없고 모두 폐허가 되어있었다.
고저에서 아가리 배(LST수송선)를 타고 밤에 떠나 부산 서면 포로수용소에 도착 심사를 거치고 논산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포로생활을 하다가,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반공포로 석방사건 때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