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월리 김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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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20회 작성일 2018-03-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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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동 (남, 85세, 양양읍 월리)
■ 면담일 : 201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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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기름을 짜고 난 대두박에 감자와 쌀을 조금 넣고 죽을 쑤어먹고 살았다.


손양 우암리에 살았는데 집형편이 안 좋아 인민학교도 못 다니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16세가 되던 해에 6 ․ 25전쟁이 났다.
인공정치 때 마을에서는 조국보위훈련을 한다고 민청단과 소년단 활동을 매일 같이 하였다. 훤하게 날이 세서 아침이 되면 마을 동사에 모여 줄을 서서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몇 가지 구호를 외치고 나서야 집에 가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은 주로 콩 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인 대두박을 물에 불려 쌀과 보리를 조금 넣고 또 감자 등을 넣어 죽을 끓여 먹었는데, 어떤 대두박은 깨면 곰팡이가 나오기도 했으나 그렇지만 어쩔 수없이 이렇게라도 식사를 한 후에 일터로 나갔다.



◆ 왕대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만든 창을 들고 훈련을 했었다.


당시 민청단은 남녀 구별 없이 조직하여 조국보위 훈련을 하는데 나무로 목총을 깎아 못을 박아서 훈련을 하는데 주로 사람 잡는 연습을 하였다. 저녁 모임에도 주로 구호를 외치고 회의를 하여 집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만약 나가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 안 나갈 수도 없었다.

훈련을 할 때는 왕대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만든 창을 들고 훈련을 했고, 훈련에 나오라고 할 때는 정신없이 괭가리와 징을 요란하게 치며 소리를 쳤는데 여맹회의는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6 ․ 25 전 인공정치 때 부잣집들은 노인들만 남고 자식들은 대부분 다 월남을 했으며, 사촌형을 비롯한 친척들 일부는 왜정 때 이미 월남을 하고, 남아 있던 집안 형님과 동내사람들이 월남하려고 모의하다가 그들 중에 골수공산당원 동생이 끼어 있어 발각되어 잡혀 가기도 했었는데 어떻게 무사 했었다.
그 당시 남으로 나갈 사람들 중에 공산당원 동생이 있다 보니 무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마을사람들 대부분은 항상 월남을 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다.
그때 월남해 가는 루트는 주로 부소치산에 있는 농골이 재로 넘어갔다.
그때 우리 집안 형님은 일본 해군에 있었는데 월남을 해서 다시 남한 해군 들어갔다가 후에 서울 한강물이 많이 나갈 때 인명을 구조하려다 애석하게 목숨을 잃었다.



◆ 몰수한 재산을 받은 자들은 열렬한 공산당원이 되었다.


쌀농사 못자리는 밭에 씨를 뿌리고 모래를 져다 덮어 모판을 만들어 모를 키웠다가 동내 사람들과 서로 모내기를 도왔다. 그러나 가을이면 벼가 익기도 전에 벼를 베어 현물세를 바치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집안 식구가 먹을 것만 조금 남겨놓고 거의 다 가져가고 남는 것이 얼마 없다.
논이 많은 집은 몰수하여 논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했다. 그렇게 재산을 몰수해서 배우지 못한 자 와 못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그 사람들은 책임을 지고 열렬한 공산당원이 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동네에서 살면서 이쪽 패와 저쪽 패를 서로 다 알고 있어도 말을 못하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우리 집은 아래윗집이 사이가 좋아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밤에 누가 엿듣는 것 같아 갑자기 문을 확 하고 열었더니 누가 마루에서 마당으로 공중 나가자빠지더니 급히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자가 누구인줄 대강 짐작이 가서 알고는 있었으나 말하지 못하고 참고 살아야 했다 우리는 논 300평이 있었고 왜정 때 일을 열심히 해서 착실하게 돈을 모아 1천 평을 샀는데 그 논을 몰수당해 누구에게 주었는지 모른다.
배말에 살았던 윤규병 네는 땅이 많아 만석 군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땅을 몽땅 빼앗기고 6 ․ 25전쟁 때 남으로 피란을 나갔는데 실종이 되었는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 박격포탄을 등에 지고 바지를 빨가벗고 남대천을 건너 논화리로 갔다.


당시 낙동강전선까지 밀고 내려간 인민군들은 대구 방어선을 사수하는 아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에 보급로가 끊어지게 되자 인민군들은 38°선 이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이 월리에 야포 3문의 포신을 북쪽으로 향하여 겨냥해 설치해놓고 있었고, 한쪽에는 80mm와 60mm 박격포탄과 수류탄 등을 갑빠로 씌워 덮여져 있었다.
이때 우리는 짐꾼으로 동원되어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지고 바지를 빨가벗고 남대천을 건너 논화리 뒷산까지 올라가니 거기서는 이미 전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짐을 풀어놓으면 어른들은 나무를 찍어 황덕불을 피워 놓고 자고 나서 날이 세면 또 포탄을 지고 이번에는 가라피까지 지고 올라갔다.
그때 오색 가라피에 미군 쌍다리 비행기가 보급품을 낙하산에 메달아 떨구는데 보급품이 색깔에 따라 먹는 것, 피복, 탄약 등으로 구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리를 깔아놓듯이 일자표시와 십자표시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표시한 것 같았으나 그러나 비행기에서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낙하지점을 잘못 판단해서 보급품이 인민군지역에 떨어진 것도 있었다. 그후 1 ․ 4후퇴 때 국군이 다시 후퇴를 할 때 집으로 돌아왔다.



◆ 우암리 집들은 불에 타지 않아 인민군들이 먹고 자는 숙식 제공처가 되었다.


형은 19세였는데 인민군에 입대 장전까지 가서 아군과 전투를 하다 도망 처 나와 산속에 숨어 미숫가루와 머루와 다래 그리고 풀까지 뜯어먹고 살다가 10월에 국방군이 들어오자 국군의 군속으로 따라 다녔다.
1950년 12월 말인가 국군이 후퇴할 때 양양은 모두 불에 탔는데 우암리는 불타지 않았다. 그러나 집이 안타는 바람에 쓸 때 없는 고생만 더하였다.
아군이 재 반격을 하면서 인민군 패잔병이 후퇴할 때 인민군 부대가 불이 안탄 집으로 들어오게 되자 집을 가진 사람들은 인민군들에게 밥도 해주고 방에서 잠까지 자니 진작 우리는 굴을 파 놓은 것이 있어 굴속과 밖에서 자야만 했었다. 그렇게 한패가 지나가면 또 다른 패가 오고 계속 이어졌다.
이때 여군들도 많이 섞여 한방에서 그냥 막 잤다. 그리고 총 맞은 군인과 화상을 입은 군인도 많았는데 양양까지 말에 사람을 태우듯이 소 등질매에 태워 데려다 주기도 하였고, 한번은 다리를 다쳐 걷지 못하는 부상병을 먼 거리인 상복골까지 태워다 준적도 있었다. 그리고 밥을 여러 번 먹고는 영수증까지 해 주며 다음에 나와 갚아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가차고 웃기는 노릇이다.
그 와중에도 바다에 떠있는 함대에서 함포사격으로 포탄 날아가는 소리가 산을 울리며 날아갔다. 그때 인민군들이 조금 있으면 국군이 온다고 동네 책임자가 소식을 전해 동네사람들과 함께 산박골 골짜기로 먹을 것을 조금 싸들고 들어갔다가 바로 국군이 들어와 패잔병들과 공산당원들이 다 북으로 들어가자 굴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국군이 왔다는 소리에 집에 들어왔는데 며칠 후 국군을 만났다.
그 후 2차 피란을 잠깐 나갔다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오죽했으면 피란을 나갈 때 집에다 불을 싸놓고도 싶은 생각을 다 했었다.



◆ 국군이 들어오자 공산치하에서 빼앗겼던 논을 다시 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 평생에 좋은 일은 이북 정치를 싫어하고 남한 정치가 된 것이 태어나서 제일 기쁜 일이라 생각한다. 국군이 후퇴할 때 강릉까지 피란을 갔다.
그때 어린 동생은 엄마가 업고 그 위 동생은 아버지가 지게에 올려놓고 가고 나는 찹쌀을 조금지고 강릉 비행장 근처인 하시동까지 가서 남에 집 부엌에서도 자다가 다행히 피란을 나간 빈집에 들어가 솥이 없어 양푼에 불을 해놓고 밥을 해 먹으면서 15일정도 고생을 하다가 국군이 다시 밀고 들어간다고 하여 국군을 따라 우암리 들어오니 양양은 다 불에 탔는데 우리 집은 타지 않았다.
우리 집은 국군이 들어와 공산치하에서 빼앗겼던 논 1천 평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만석군 이였던 윤규병씨는 피란 가서 죽고 그 아들들이 들어와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고, 그때 땅을 분배 받은 사람들은 수복이 되기 직전 대부분 북으로 다 도망쳐서 들어갔다



◆ 특수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잘못파악 전사자로 처리 되어 충혼탑에 위패봉안


휴전 막바지에 이르러 38°선 이북 휴전선 일대 고지에서 국군과 적군이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무렵, 군부대에서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하면서 나와 우리 동내사람 3명을 따라 오라고 하여 수여리에 가니 이미 해가 넘어가고 어두웠다.
손양면 하수여리 동네의 빈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나니 M1총 여러 정과 인민군이 사용하는 아시보 소총 1정이 세워져 있었다.
군부대 사람들은 우리보고 M1총 분해하고 결합하는 교육을 시킨 다음 새벽이 되자 차에 태우고 전방인 간성을 지나 거진으로 가서 내려놓는다. 거진에 도착하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와 있었고, 별도 건물은 없었고 주로 빈집에 들어가 생활했으며 2월의 추운 날씨에도 아침으로 팬티만 입고 구보를 시키고 나니 몸이 얼어서 뻣뻣하였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큰 천막 속에 들어가 북파 시 정보수집에 관한 교육을 시키는데 인민군이 어디에 몇 명이 배치되어있는지, 무기는 어떤 것을 가졌는지 등의 교육을 받는다.
우리보다 앞서 3명이 한조가 되어 북으로 적의 동태를 탐지하러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 대원들이 많았는데, 소문을 들으니 침투도중에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한다. 며칠 후 우리조가 어둠을 타고 북한 쪽으로 침투를 하였다.
거진에서 적진인 대진까지 3시간을 걸어서 적진영으로 침투하였으나 상황이 좋지 않아 성과 없이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고 얼마 후 북에 들어갈 일이 없어졌는지 상부에 지시에 따라 3월말경 임무를 끝내고 집으로 왔다.
그때 내가 소속부대는 HID로 북파 공작 시적에게 생포되면 정보누설 관계로 동료 이름조차도 제대로 모른 체 북파공작원 임무를 수행했다. 나는 북파 공작원을 수행하다가 전사한 걸로 된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경기도 성남시 금표동에 위치한 충혼탑에 봉안되어 있으나 제10-1차 전공 심의 시 생존자로 확인되어 있는 위패를 삭제하였다.
휴전이 되고 농사일을 하다가 군에 입대 논산훈련소 22연대 10중대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로 배치되어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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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동씨 특수임무유공자증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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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동씨 전사자 봉안위패 삭제관련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