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남문4리 유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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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5회 작성일 2018-03-1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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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일 (남, 83세, 양양읍 남문4리)
■ 면담일 : 201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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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이나 괭이를 들고 나오시오 하고는 바로 인민군으로 뽑혀갔다.


손양면 여운포리에 살았었는데 우리는 이북에서 출신성분이 좋지 않았다. 북한 공산주의사회에서는 땅을 5정보 이상 가진 사람은 몽땅 빼앗고, 3정보이상 가진 사람은 토지만 몰수하여 100리 이상 쫓겨났다. 아버지는 36세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청상과부가 되셨고 토지는 다 빼앗기고 나니 먹고살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일을 하러 나가시고 나는 집에 혼자 있는데 면사무소 인민위원회 세포위원장이 와서 하는 말이,“동무, 집에 있었구만 제국주의자들이 폭격이 심하니 삽이나 괭이를 가지고 나오시오!”라고 하여 따라 나가니 약 70~80명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삽질은 한 번도 안하고 원산 북쪽 고제읍 까지 갔는데 그때가 1951년 4월 11일이였다.
고제읍에 도착하니 거기에는 이미 다른 지역에서 징집되어 훈련병으로 모집된 인원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부대에는 차가 한두 대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집된 훈련병들은 원산에서 도보로 출발하여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주로 밤에 이동하여 평양을 경유하여 신의주에 도착하니 미국 구라만(미국 그러먼사의 F6F헬캣 전투기) 비행기가 새까맣게 날아와 폭격을 가했다.



◆ 나는 항상 인민군에서 탈출을 해야 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군사 훈련을 하는데 목총을 깎아 들고 훈련을 하다가 목총이 부러지면 작대기를 들고 훈련을 했다. 1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2개월 반을 행군하여 황해도 연백에 도착하여 단발 장총인 아식보(소련제)소총을 지급받았고 분대장은 71발의 총알이 들어가는 따발총을 가지고 있었다. 부대는 다시 이동하여 월비산(지금 금강산 전망대)에 도착하여 3~5명씩 조를 짜서 유엔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았다.
1개 소대병력이 35~36명인데 잠잘 시간이 없다. 병력 중 1/3은 30리 후방에 가서 식량 구해오고, 1/3은 전투하고, 1/3은 굴을 파야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고향에서 인민군에 먼저 갔던 친구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탈출하여 외딴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집에 도망 처 온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1개조 3명이 탈출을 결행하였다.


1개조가 3명으로 우리 조 중에는 서울출신으로 공산당이 좋아서 지원을 했다는 17세의 중학생과, 의주 농촌에서 온 3~4살 위인 장가를 간 청년이 한조였다. 힘들고 괴로우니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중에 서울서 온 청년이 탈출하자고 제의를 했다.
그는 삼촌이 남한 헌병 말똥 2개라 했다. 굴을 파다가 교대하여 막사로 와서 자는데 셋이 누워 손에다 글씨를 써서 소통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이가 위이고 장가까지 갔다는 고참은 급하게 하지 말고 천천히 하자고 했고, 나는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고, 서울서 온청년은 아직 철이 없다.
그래서 셋은 새벽까지도 합의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가겠다. 하고 일어나니 모두가 마음이 긴장되어 조용해지고 떨리지도 않고 안정되었는지 둘 다 따라 나선다.
막사 입구에 나오니 눈이 쌓여있는데 막사를 지키는 동초가 걸림돌 이였으나 그때 마침 보초가“야 너 잘 나왔다 내가 지금 급해서 똥 누러 갔다 올게.”라고 하자 나는 야, 냄새나니까 멀리 가서 싸 라고 하면서 보초병이 소지하고 있던 수류탄 1개와 총을 가지고 도망을 나와 솔가지를 길게 꺾어 썰매를 만들어 타고 신속히 이동했다.
동초가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안개가 자욱하여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때 나무를 꺾을 때 딱 하는 소리가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 유엔군이 담배도 주고 통조림도 주었는데 꿀맛보다 더 좋았다.


우리는 지뢰가 묻힌 곳을 알고 있어 요리조리 피하여 남쪽으로 향해 걷다가 약 3~5m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마주섰다. 나는 헬로! 헬로! 하고 유엔군을 불렀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1명은 사격자세, 1명은 권총을 들고 가까이 왔다.
때 마침 안개도 싹 가시고 하늘이 청청해지자 긴장했던 마음이 다 풀어지니 유엔군 정문 앞에 인민군이 다발총을 들고 추격해 오는 것 같이 허깨비가 눈에 선 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유엔군을 따라 들어가니 난로를 뜨끈뜨끈하게 피워놓아 얼었던 손이 풀렸다. 유엔군이 담배도 주고 통조림도 주었는데 꿀맛보다 더 좋았다. 당시 미군과 인민군과 직선거리 약 100m도 안되어 보이는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나중에 유엔군이 우리를 심문할 때 항공사진을 보니 장작 패는 사람 이름까지 알 것 같았고, 특무장(선임하사)은 누구고 박격포는 어디 있는지 다 알 수 있어 신기하기만 했다.
인민군은 장교도 담배공급이 안되어 싸리 잎, 취 잎사귀를 말려 말아 피웠는데 담배를 주니 너무 고마웠다. 유엔군 천막 수용소에 오니 40~50명의 인민군이 시끌시끌했다. 후에 나는 심문을 받은 후 상급부대로 가서 서울 어떤 공장안에 3~4일 수용되어 있었는데 같이 온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이 헤어져 섭섭해 울었다.



◆ 거제도 95수용소는 좌익수용소로 인공기를 게양하였다.


서울서 유엔군 버스로 부산을 가서 LST 배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도착 2월부터 수용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61수용소에서 인원파악과 심사를 하고 5열로 서라고 했다. 포로 선배가 벌도주고 위세를 부려 우리는 벌벌떨었다. 나는 포로 옷을 입혀 95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포로들 중에는 귀순자와 빨갱이도 섞여있어 서로 싸우고 엎드려뻗쳐 벌도주고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때려 그 자리에서 죽는 일도 보았다. 포로 중에는 좌익이 80%를 장악해서 귀순자 끼리 단합하여 밖에 카츄사 들이 도와주고 보초서는 사람도 한국군이어서 도와주었다.
포로들은 우리도 자유를 달라, 양담배를 달라! 한 끼 굶더라도 담배를 피워야 한다고 요구했다. 93수용소는 우익 수용소로 태극기를 달았고 95수용소는 좌익수용소로 인공기를 게양하였고 94수용소는 이념전쟁에서 우익이 이겨 우익이 장악했다.
이렇게 싸우니 좌우익별로 갈라놓았다. 대한민국에 남겠는가? 북으로 갈 것인가? 당시 포로들은 거제도를 제외하고 육지에서는 여수, 광주, 논산, 마산, 부산, 부평으로 갈라 수용하였는데 나는 광주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명령으로 수용소를 뛰쳐나왔다. 미군들은 우리를 잡으려고 사방으로 찾아다녔고, 새벽에 갑자기 나오니 갈 곳이 없어 민가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마을 이장을 찾아가니 경찰서에서 연락이 되어 도와주었다. 그 후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바로 자원입대하여 군 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