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남문3리 김남하

페이지 정보

조회 1,256회 작성일 2018-03-12 15:42

본문

■ 김남하 (남, 90세, 양양읍 남문3리)
■ 면담일 : 2015. 8. 16


55.jpg



◆ 교장보다 당원인 교무주임이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강현면 강선리에 살았었는데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을 때 강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년 놀다 평강농업학교 2학년에 다녔다. 당시에는 춘천에 농업학교가 있고 고성 금강중학교, 강릉에 중학교가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북한 인민공화국에서 교사를 뽑는다고 하므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고성 공현진 인민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그때 청년들을 인민군으로 뽑아 가는데 교사는 제외하였다. 그 당시 학교에는 직업동맹이 있어 교장이 있었지만 교감 급에 해당하는 당원인 교무주임이 실권을 더 가지고 있었다. 독보회 라고 하여 공산당인 교양주임이 공산당 이론을 매일 아침 가르치고 신문을 읽어주고 하였다.
또 보도안을 써서 검사를 받고 가르치는데 내용은“미국 놈이 다섯 놈있는데 두 놈을 총으로 쏴 죽이면 몇 놈 남았나?”등으로 남한이나 미국을 증오하는 내용으로 보도안을 작성해야 교무주임의 결재를 받고 가르쳤다.
그때는 모두가 당원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6 ․ 25남침이 임박해서는 인민군이 내려와 학교를 비워 달라하여 내막은 모르고 비워주고 학생들을 2~3일간 방학을 하는 줄 알았지만 그때 교사들은 매일 밤 학교에 나와 지켰다.



◆ 마구간에 있는 소가 내 머리카락을 뜯어 먹으려고 했다.


1950년 6 ․ 25전쟁이 나서 다른 청년들은 인민군에 징집을 하는데 교사들만은 군에 뽑아가지 않았다. 2년간 근무하다가 회룡인민학교에서 지리학과 연구 발표가 있는데 4학년 담임을 하고 있는 나를 나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 같은 발표 자료를 만들어 회룡학교에 가서 발표를 하였다.
그런데 국군이 진격해 온다고 하여 다들 고성 공현진 학교로 가는데 나는 가지 않고 가족이 살고 있는 강선리 집에 남았다. 그리고 얼마 후 1 ․4후퇴 때 우리 식구는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으로 피란을 나갔다.
강릉 사천에 이르러 남의 집 부엌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때 드러눕는 장소가 좁아 어떻게 하다가 부엌 옆에 붙은 마구간 소 구융(구유:소 먹이통) 밑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자게 되었는데 얼마큼인가 자다가 보니 소가 내 머리카락이 먹이(짚이나 풀)인줄알고 혀로 잡아 댕기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나는 웃지 못 할 그런 일이 생기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