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구교리 최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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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33회 작성일 2018-03-12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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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원 (남, 79세, 양양읍 구교리)
■ 면담일 : 201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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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전쟁 전부터 송암리 앞 과수원에 폭탄을 쌓아놓았다.


강현면 강선리에 살았었는데 1950년 전쟁이 나기 전부터 양양 송암리 앞 과수원에는 폭탄을 실어다 쌓아놓았으며, 연창리 정거장에도 석유로 보이는 유류와 말먹이인 마초더미가 쌓여있었고, 정암리에 있는 낙산사역에도 전쟁 물자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전쟁이 임박해서는 탱크가 나왔는데 물치 다리로 지나가지 못하고 강물을 건너 지나갔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인민군이 지나가는데 나가서 박수를 치며 환영하고 계란과 음식물을 선물로 받쳤다.
6월 24일 밤 현재 양양도서관 자리에 인민군 부대가 와서 솥을 7개 걸어놓고 밥을 해 먹고는 새벽에 소리 없이 남쪽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들이 나간 지 약 한 시간 후 총소리, 대포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아버지께서 새벽에 총소리가 막 났는데 전쟁이 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1950년 6월 26일 강현인민학교에 나가니 선생님이“남쪽 괴뢰들이 우리 공화국을 1km까지 처 들어와 우리 인민군대가 반격하여 처 내려간다고”허위로 선전하였다.



◆ 비행기가 공습을 하고나면 기관총 탄피를 주워 장난감을 만들었다.


우리는 학교의 현관에서부터 시작하여 담장 밑까지 굴을 파고 비행기가 폭격하면 피할 수 있게 지붕도 씌워 놓았다. 전쟁 중에도 강현중학교는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9월 초에 현북중학교 학생들이 폭격에 여러 학생들이 죽고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군인에 징집되어 나가서 가르칠 사람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게시판에 그날의 전쟁 결과를 게시판에 점령지에 인민공화국기를 꽂아 놓아서 학생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금새통일이 된다고 말했다.
8월경에 미국 비행기가 연일 폭격을 시작했다. 인민군들이 먼저 실어다 놓은 말먹이인 마초와 석유통이 모두 폭파되고 불에 탔다. 과수원에 숨겨둔 탄약은 폭격을 피해 맞지 않았다. 만약 탄약과 폭탄에 폭격이 가해졌다면 엄청난 폭발과 함께 양양은 다 날아가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행기가 폭격을 하고 지나가면 얼른 나가서 기관총 탄피를 주워 모았다. 정찰기가 지나가야 미국 구라만 전투기가 폭격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탄피로 칼자루도 만들고 친구들과 따먹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 아버지가 둘째형과 월남을 해서 우리는 꼼작도 못하고 살았다.


북한에서 인민재판이나 교육이 있다하여 매일 밤 모여 자아비판을 하니 너무 자유가 없어 공산주의는 너무 힘들었고 아버지가 민주당원이어서 우리와는 품앗이도 못하게 하여 아버지는 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과 품앗이를 하면서 농사일을 하였다.
또 아버지가 북쪽에 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는데 안변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와서 숨겨서 묵었다 떠났는데 아버지는 그 아저씨를 외삼촌이라 하라 했는데 그는 후에 월남을 했다.
한때 양양 내무서는 아버지를 붙잡아갔다가 풀어주었는데 아버지는 북쪽으로 가는 척 하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아버지는 그 길로 둘째형을 데리고 월남을 하여 남아있던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꼼짝도 못하고 살았다.
얼마 후 국군이 왔을 때 국군을 따라 피란길에 나섰는데 첫날은 청곡리 논둑에서 자고 남쪽으로 피란 갔다. 아버지께서는 수복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당에 가입하는 일은 절대로 못하게 하였다.



◆ 인민군 패잔병에게 밀려 통천까지 국군을 따라 피란을 갔다 돌아왔다.


사람들은 경상도까지 처 내려갔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북으로 쫓겨 도로 쪽이 아닌 산 쪽으로 후퇴를 하니 주민들은 인민군을 피해 다시 북쪽으로 피란을 간 것이다. 그런데 국군 선발대는 7번 국도를 따라 들어가고 인민군 패잔병들은 뒤에서 산길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인민군은 수 천 명이 회룡리 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염전 고개를 따라 속초 쪽으로 넘어 갔다. 그 대장은 무정장군이라 하는데 백마를 타고 있었다. 어른들은 고성 쪽으로 피란을 가고 아이들은 설악산 핏 골 쪽으로 피란을 갔다. 그때 주민들은 고성 통천까지 국군을 따라 피란 갔다 돌아왔다.



◆ 우리 집 소가 폭격으로 도망갔다가 화상입고 등이 타서 돌아왔다.


우리 집에서 숨겨서 월남했던 안변 청년이 보안대장이 되어 찾아와 동네에서 북한에서 책임 맡았던 간부들을 찾아 죽이려 할 때 아버지가 나서서 우리 동네는 그런 사람이 한명도 없다하여 다른 동네처럼 서로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일이 한 건도 없었다.
1 ․ 4후퇴 때는 강선리에 인민군이 와서는 나보고 쌀을 중복리 까지 지고 가자고 했다. 이양섭 아저씨는 장애인 이였는데 그 아저씨는 4말, 나에게는 3말을 지고 가자고 하여 싫다는 말도 못하고 져다주었다. 또 우리 집 큰 소 가 폭격에 맞아 어디로 도망갔다가 저녁때 돌아왔는데 등이 타서 화상을 심하게 입었다. 인민군이 달라고 하여 돈 3천원을 주며 가져갈 때, 어머니는 소머리는 주고 가라고하여 우리가 삶아 먹었다.



◆ 다섯 살이나 많은 형님 벌되는 학생들과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1951년 봄 인민군이 북쪽으로 완전히 후퇴를 하였을 때 강선리에 돌아와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북한에서는 중학교 2학년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중학교가 없어 초등학교에 들어가 배웠다.

나는 북한에서 인민학교에 입학할 때도 3학년부터 다녔다. 학교에 가니 안 받아주어서 서당에 가서 일본어, 한글, 한자를 배웠고 구구단도 5단까지 외웠다. 수복이 되고 학교에 가니 글을 써 보라해서 썼고 구구단도 외워 보라하여 외웠더니“너! 3학년 다녀.”라고 하여 3학년부터 다니다가 6학년을 졸업하고 구 속초중학교 자리에 있던 중학교에 다녔는데, 그때 학생들은 나이차이가 있어 다섯 살 많은 학생들과도 같이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