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서문리 한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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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49회 작성일 2018-03-1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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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성 (남, 87세 양양읍 서문리)
■ 면담일 : 2017.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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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조상을 여기에 두고는 월남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서면 내현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9 살 때 돌아가시어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형과 어머니를 도와서 농사일을 하였는데, 형이 공산당이 싫다고 월남을 하게 되니 누나들과 농사일을 하였다.
해방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38°선을 넘어 월남하기가 어렵지 않아서 사촌들도 공산당과는 같이 살 수가 없다고 월남하여 우리 가족은 마을에서 주요 감시 대상으로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더욱 살기 어려워 가족 모두 월남하자고 하였지만 어머니가 조상을 여기 두고 어떻게 가느냐고 못 간다고 하여 남아 살고 있었다.
1950년 6 ․ 25전쟁이 나서 동네 청년들이 인민군에 뽑혀 가는데 나는 월남가족이라 하여 인민군에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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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성씨 명예제대증 〉(한종길은 구명임)



◆ 짐꾼이 되어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들어갔다.


인민군이 국군에 밀려 후퇴할 때 동네 세포위원장이 동네 친구들 4명을 데리고 양양에 오니 이미 모여 있는 청년들이 약 20여 명이나 된다. 그렇게 모인 청년들에게 인민군이 짐을 지고 북으로 가자고 하여 쌀 2말 정도를 지고 큰길을 피해 주로 산악지대로 인민군과 함께 후퇴를 하였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비행기의 폭격과 바다에서 함포사격을 하니 정신없이 피하면서 따라 가다가 나는 인민군들 몰래 친구끼리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겠지! 살려면 도망을 가야하는데 잡히면 총에 맞겠지 하며 한숨만 쉬었다.
고향은 점점 멀어지는데 서로 눈치만보며 따라 갔다. 밤이 되면 빈집에 들어가 자거나 숲에서 잤고, 비행기 폭격이 심해져 빨리 갈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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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성씨 제대증서 〉



◆ 국군이 주는 건빵을 처음 먹어보니 참 맛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일행은 숲속에 숨어 있는데 자동차 소리가 났다.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우리를 감시하던 인민군들이 보이지 않자 우리는 자동차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국군들의 자동차가 확실했다. 같이 가던 일행 3명은 지고 가던 짐을 벗어던지고 손을 들고 국군이 오는 방향으로 나갔다.

국군들이 우리 일행에게 이것저것 자세히 묻자 나는 우리 형님도 국군에 갔다고 말하고 우리는 현재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짐꾼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고 말하니 건빵을 주어 처음 먹어보는 건빵이라 참 맛있었다.

그 국군들은 우리보고 집으로 가라고 하면서 자동차까지 태워주어 양양까지 무사히 왔다. 나는 내현으로 가지 않고 인구에 있는 작은집으로 가니 어머니와 누나들도 모두 인구에 와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인구에서 입대 영장을 받고 묵호항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훈련을 받고 다시 양양으로 보내져 조산에서 훈련을 받고 15사단 39연대 1대대 2중대에 배치를 받았다.



◆ 소대장의 시체와 전우들의 시체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부대는 고성 통일 전망대 앞 351고지 작전에 투입되었다. 351고지는 국군이 점령하고 있다가 인민군에게 빼앗겼다고 했다. 그때 우리 2중대는 예비중대로 잠시 대기하고 있다가 새벽에 M1소총과 총탄을 양 어깨에 X자고 메고 수류탄 2발, 건빵 2봉지, 그리고 수통에 물을 채워가지고능선을 타고 올라갔다.
앞서가던 주 부대가 깨지고 우리중대가 이어서 공격해 올라갔다. 머리위로는 인민군 총알이 수없이 날아갔다. 관측소에서 작전지휘를 하면 소대장이 공포탄을 쏘며 공격하라고 독려하지만, 무차별 폭격으로 산에는나무나 풀은 한 포기도 없는 민둥산에 앞서가던 전우들의 시체가 쓰러져
있으니 겁이나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8부 능선까지 올라가 공격을 하려니 앞에서 지휘하던 소대장이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도 정신도 없이 소대장 시체를 밟고 또 전우들의 시체가 호에 널려있어 밟지 않고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소대장이 전사하자 향도의 지휘에 따라 전투를 하였다.
인민군들은 산위 토치카에서 아래를 보고 사격을 하니 국군은 불리할 수 밖에 없었었고, 대포는 어느 쪽에서 쏘아서 떨어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 철모가 날아가며 다리 쪽이 뜨끈해서 몸을 일으키다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바로 앞에 적군방향으로 수류탄을 던지려고 일어서는데 쓔웅하고 굉음소리가 나더니 꽝 하고 떨어지는 폭탄의 폭풍에 철모가 날아가면서 순간 다리 쪽이 뜨끈해서 일어서려고 몸을 일으키자 그 자리에 펄썩주저앉고 말았다.
재차 다시 기를 쓰고 일어서려고 애를 써 보자 별수가 없다. 다리에 총알인지 아니면 대포 파편에 맞은 것 같았다.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려서 가지고 있던 압박붕대를 꺼내서 다리에 감고 지혈을 한 후 중간 방공호까지 간신히 기어 내려왔다.
얼마 후 후퇴명령이 났는지 우리 군이 내려왔다. 향도가 나를 업고 내려 오는데 업은 몸이 출렁거리다 보니 다친 곳이 더욱 아프다. 그때 포화 속에서 살아서 내려 온 전우는 불과 7~8명 정도였다.
들것에 실려 산 아래에 와서 군 앰뷸런스에 실려 속초 후송병원에 잠시 입원했다가 배를 타고 묵호 제59육군병원에 후송되었지만, 부상 부위가 호전되지 않아 부산 3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거기서 몇 달 치료를 받고 상처는 나았지만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라 재대 시켜 주어 상이군인이 되어 북평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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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기장수여증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