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구교리 노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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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95회 작성일 2018-03-1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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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재춘 (남, 83세, 양양읍 구교리)
■ 면담일 : 2015.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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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은 국군으로 동생은 인민군으로 서로 다른 전쟁터에서 싸웠다.


서면 용천리에 살았었는데 6 ․ 25한국전쟁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때 기차에는 군수물자만 실어 나르고 사람들은 태우지 않았다. 아버지가 월남하려는 자들을 안내해 주는 일을 한 월남방조사건에 연루되어 원산 감옥에 1년간 수감 되었다가 50년 6월에 만기 출소하였는데 군수 물자수송으로 기차를 태워주지 않아 걸어서 나오셨다.

우리 형제들이 월남하였으니 아버지를 믿고 월남을 결심한 사람들이 안내를 부탁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한번에 2~3명씩 7~8번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내무서원이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다고 마을 사람들이 알려주었지만 잠복하고 있었던 내무서원에 잡혀 양양 내무서에서 재판을 받고 원산형무소에 갇힌 것이다.
1950년 5월 이전부터는 인민군들이 기차에 군수물자를 싣고 와서 월리 아카시아 밭에 탱크를 숨겨놓고 밤에는 38°선 근처로 옮겨갔다. 동네사람들이 자연히 흰 패와 빨간 패로 나뉘었다.
우리는 형과 사촌들이 서울로 공부하러 갔기 때문에 흰 패라 하였다. 작은형은 인민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나갔는데 포로가 되어 거제도수용소에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할 때 돌아왔다. 그러니 형제가 형은 국군, 동생은 인민군으로 전쟁터에서 싸운 것이다.



◆ 고향에 있어야지 왜 여기까지 왔소, 고향으로 가시오.


1 ․ 4후퇴 때 우리는 용천에 살았는데 국군 대대 본부가 우리 집이었다.
군인들이 곧 후퇴를 하는데 인민군이 집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집은 우리가 태우고 나갈 테니 먼저 나가라고 했다. 벌써 양양읍내는 화재가 나서 밤하늘이 벌겋게 밝아있었고 주인을 잃은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소등에 질매를 얹어 짐을 싣고 남은 곡식들은 땅에 묻고 소 3마리를 끌고 피란을 떠났다. 첫날밤은 현남 광진리까지 가서 어두워서 어떤 기와집에 들어가니 주인은 없고 쌀도 놔두고 떠나서 우리는 주인처럼 밥을 해 먹고 경포까지 갔다.
주문진에 가니 인민군이 벌써 와있다.“어디서 사는 사람인데 여기까지 왔소.”인민들이 자기“고향에 있어야지 왜 여기까지 왔소. 고향으로 가시오.”우린 겁을 먹고 북으로 가는척하다가 강릉 경포까지 나갔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인민군에게 폭격을 해서 인민군이 쓰러지면 몇이 그 부상한 동료를 끌고 도망가는 모습도 보았다. 폭격에 다 죽을 것 같았지만 숨으니까 많이 죽지는 않는다. 모두 귀한 집 아들인데 폭격으로 죽이는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도 많지만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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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중인 노재춘씨 〉



◆ 강릉에서 식량이 모자라서 소 두 마리를 식량과 바꾸어 먹었다.


이번엔 헌병을 만났다. 헌병은 심부름을 시키고 군인들의 잔일을 하는 쑈리를 하라고 했다. 우리가 따라가면 건빵을 많이 주었다. 배가 고플 때 그 건빵 맛은 참 좋았다. 아버지는 우리는 배가고파도 한군데 있어야 한다며 못 가게 했다.
강릉에서 식량이 모자라서 소 두 마리는 식량과 바꾸어 먹었다. 밥 얻으러 다니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초상집에는 가지 않다가 피란을 가서는 그런 집이 있으면 꼭 찾아가서 한 끼라도 해결하였다.

다시 국군이 양양을 탈환하여 고향으로 남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오는데 주문진 교황리 청년 몇이 쫓아와서 자기네 소라고 빼앗는다. 그쪽이 숫자가 많다보니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서울 있던 사촌 형님이 주문진에 경찰로 와 있어서 고발하여 소를 찾아 올수 있었다. 그들도 인민군에게 소를 빼앗기고 다른 사람에게 떼를 쓴 것이다. 그 사람도 억울해서 그런 것이니 혼내지 말라고 부탁하고 왔다.

집은 타 없어지고 묻어둔 곡식들은 모두 파 헤쳐져 있었다. 우선 집 탄자리를 치우고 온돌에 흙과 돌을 섞어 쌓고 지붕은 솔가지나 풀을 이어 비를 가리게 하고 살았다.



◆ 교실은 불탄 방앗간에서 멍석을 깔고 책상은 포탄상자로 만들었다.


국군이 양양에 입성하여 마을마다 부역이 배당되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병약하여 내가 대신 나갔다. 군용차로 도착한 곳은 고성 건봉사 근처 공병대부대였다.
도로 보수나 길을 닦기도 하지만 탄약과 보급품을 지고 산위로 운반하는 일을 했다. 몇 번을 나르고 있었는데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철모에 벗겨진 글씨를 칠하고 잔심부름을 시켰다. 껌, 비스킷 등 과자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약 1개월을 있었는데 동료가 집에 가지 말고 같이 다니자고 했지만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얼마 있으니 학교에 가라고 해서 학교에 가니 벌써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 중학교 3학년에 들어가니, 군인을 갔다 온 학생도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3~4살이나 더 많았다.
교실은 서성용이네(현재 구교리 태산연립 앞 헬스장)불탄 방앗간 에서 멍석을 깔고, 군인들 쓰고 남은 포탄상자로 만든 책상에서 공부를 했다.
고등학생은 거의 인민군 나가고 살아서 돌아온 학생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부터는 깎은 목총을 내주고 제식 훈련과 총검술을 가르쳤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치 비행장에 왔을 때 학생들이 행사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