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청곡1리 이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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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00회 작성일 2018-03-1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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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숙 (여, 91세, 양양읍 청곡1리)
■ 면담일 : 2017.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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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군대에 안 보내려고 17세 나이에 감곡리로 시집을 보냈다.


해방 전인 일제 강점기시절 군대에 갈 나이가 되는 여성들을 여군으로 뽑아서 데려간다고 하여 나도 강현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한줄로 섰다가 두 줄이 되고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고 하는 제식훈련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나를 군대를 안 보내려고 17세 나이에 감곡리로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시집을 오자마자 남편이 일본군에 징용되어 군대를 가게 되자 나라에서는 집 앞에 깃대를 세워주었다. 남편은 훈련을 받고 만주에 있는 부대에 배치되어 갈려고 하였지만 마침 해방이 되어 며칠을 걸어서 돌아왔다.
해방이 되고 공산당이 정치를 하는데 논밭이 없으니 논을 분배 받아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봤자 공산당에 공출을 하고 얼마 남지 않지만 그래도 원래 논 주인에게는 몰래 쌀을 갔다가 주기도 했다.
남편은 평소에 남에게 나쁜 일은 안하고 살았고, 나중에 국군이 들어오게 되자 그 집에서 논을 사라고 하여 장리쌀을 내서 샀는데 장리쌀은 1가마면 가을에 1가마 반이 늘어나 갚기가 어려웠다. 그때 시댁에서는 6가마의 장리쌀을 내서 700평의 논을 샀는데 3년 안에 갚으려 했지만 6년 만에 다 갚았다.



◆ 남편은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


내가 시집에온지 6년만인 1950년 전쟁이 났다. 그때 우리 시누이가 예쁜 처녀다보니 군인들이 밤이면 찾아와 아가씨 내 놓으라고 방에 불을 켜라고 하자 시아버지는 부싯돌로 불을 켜는데 거짓으로 부싯돌을 켜는척하여 불이 안 붙어 방을 어둡게 만들어 옷장 이불속에 숨어서 떨고 있던 시누이가 위기를 모면했다.
나는 아이가 있어 머리는 쪽을 찌고 살았지만 아가씨들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얼굴에는 검댕이 칠을 하고 옷은 다 떨어진 옷을 입혀 천한모습을 하고 살았다.
인민군에 밀려 애기를 업고 피란을 가는데 폭탄이 떨어지면 나가자빠져 죽은 사람도 있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강릉 초당에서 하룻밤을 자고 삼척까지 가는데 며칠을 걸어서 가다가 길가에 사람 죽은 시체가 여럿이 쓰러져 있지만 돌아다보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그때 남편은 일본군에 갔던 경험이 있어 피란을 안가고 먹을 것을 지고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인적이 거의 없는 깊은 산속으로 가서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부인이나 가족이 알면 들키거나 피란을 다니다 보면 잡혀서 군인이나 짐꾼으로 가야한다고 산속에서 살았다고 했다. 우리도 삼척에 가서 먹을 게 없어 파랗게 자란 보리를 베어 국을 끓여 먹고 살기도 했다. 봄에 집에 돌아 왔을 때는 피란을 갔다 온 가족이나 숨었다가 나온 남편도 얼굴이 형편이 없이 말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