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성내리 박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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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90회 작성일 2018-03-1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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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철 (남, 84세, 양양읍 성내리)
■ 면담일 : 201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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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는 소련군이 주둔하여 누에고치 건조장에서 공부했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강릉으로 월남했으며, 형님은 강릉 군청에 근무하다가 변호사 시험을 봐서 강릉 법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와는 17살 차이가 났다. 형님은 내가 시험 봐서 성적이 좋으면 과자 표를 주었다.

빵집을 국가가 관리하고 운영하였다. 물자가 귀해서 과자도 맘대로 사지 못하고 표가 나와야 살 수 있었다. 내가 과자를 받아오면 누나들이 좀 달라고 쫓아다녔다. 양양에는 빵집이 한집, 포목점이 1집, 지물포(문구점)가 2집, 구루마(우차)를 수리하는 대장간이 1집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강릉으로 나갔다. 1년을 놀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연락이 왔다. 학교에 안 보내려면 왜 데려갔느냐고 하시면서 이웃집 아주머니를 따라 양양으로 들어오다가 검문소에서 소련군인이 주머니 조사를 하는데 칼만 없으면 통과시켜 주었다.
친구들이 6학년에 다니고 있다. 학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누에고치 건조장에서 학교 공부를 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학교에 오라고 해서 나갔고 학교를 1년을 쉬어도 1~2등을 하였다. 그때 6학년이 80명씩 4개반 320명이었다. 졸업식 때 1등은 도지사 상, 2등은 군수 상을 주어야 하는데 나는 5학년을 안다녀서 상을 안주어 말들이 많았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 6학년이 되었냐고 부모님을 학교에 오라고 하였다. 그 후 부모님은 나를 보고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김기정 선생께서 1주일만 있으면 교장이 고급중학교로 전근을 가니 그때 오라고 하였다. 그때는 학제가 5년으로 돼 있어서 그때에는 5학년과 6학년이 같이 졸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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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중인 박제철씨 〉



◆ 강릉서 삽당령을 넘어 정선 ․ 단양 ․ 대전 ․ 대구 ․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월남하여 강릉 작은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얼마 후 사장이 제재소를 팔고 서울 마포구로 이사를 갔는데 내 나이가 어려서 같이 가지 못했다. 18살이 되었는데 6 ․ 25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8사단이 강릉에 있었는데 작전상 후퇴한다고 했다.
형님이 고등법원에 근무하고 있어 피란을 가려니 벌써 인민군이 대관령까지 왔다고 하여 삽당령을 넘어 정선으로 갔다. 단양까지 가서 열차 위에 타고 대전까지 갔다가 다시 대구로 갔다.
대구 팔공산에 박격포 5발이 떨어져 사람들이 놀라 피란길에 나서니 길이 막혀 부산으로 가자고 했다. 그때 김석원 장군이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길에서 나를 데리고 가니 형님이 너를 보내면 집에 가서 부모님을 못 뵌다고 하면서 너는 가지마라 하면서 형님이 대신 잡혀갔다. 형님이 가더니 전쟁 필수요원증을 보여주고 그냥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