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남문1리 양재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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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26회 작성일 2018-03-1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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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재억 (남, 87세, 양양읍 남문1리)
6 ․ 25전쟁 당시 1101야전공병단 소대장
■ 면담일 : 2015.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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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군들도 잠을 자지 못해 소경이 되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제1국민 병으로 입대하여 대구 제7교육대에서 단기 20일 훈련을 받고 하사가 되어 9사단 30연대에 배속되어 강원도 영월에 주둔했는데 당시 내 나이는 23세이고 때는 1951년 1월이었다.
1 ․ 4후퇴 때 2대대 8중대 1소대에 배치되었는데 대대장은 손희선 중령이었다. 북진 중, 정선 임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81mm박격포를 쉴 사이도 없이 쏘았지만 이 전투에서 36명중 5~6명이 전사하고 7~8명이 부상자가 발생되었다. 비행기 지원 폭격을 받아 고지를 탈환하고 올라가 보니 인민군들도 잠을 자지 못해 눈이 부어 소경이 되어 있어 포로로 잡아 5~6명을 후방으로 넘기고 전진했다. 2월에는 간첩 1명을 생포했다.



◆ 노무자 1인이 적에게 정보를 주고 왔다.


적과의 거리가 2km밖에 떨어지지 않고 대치하고 있었을 때 노무자 5명을 썼다. 노무자들에게 식량을 주고 날씨가 추워 동네에 갔다가오라 했는데 2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 중 노무자 1인이 적에게 정보를 주고 왔다고 보초가 중대장에게 보고하여 중대장은 밤중에 비상을 걸어 노무자를 보리밭에 세워놓고 구덩이를 파게 한 후 중대장은 중대원들에게 본 중대에서 적에게 정보를 제공한 간첩이 생겨 죽여야 하니 그렇게 알라! 고 한다.
그 사람을 끌고 나와 눈 감아! 하니 그 사람은 눈을 감지 않으면서 “살려주세요, 한번만 살려 주세요”라고 애원을 하였지만, 중대장이 세 번을 반복하면서 눈감으라고 호령하고는 죽여 버렸다. 그 다음날에는 아침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 아침에 눈을 뜨니 인민군 시체를 베고 자고 있었다.


부대를 재편성하여 인제까지 와보니 인민군 본부 연대가 함석산(매봉산)을 방어하고 있는데 우리 9사단 28연대가 서쪽 능선, 29연대가 동쪽 능선, 30연대가 남쪽 능선에 배치했는데 인민군은 북쪽에 있었다. 본부에서 고지 탈환의 명령이 하달되어 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전하였다.
국군은 총상을 입으면 위생병이 응급 처치를 하여 들것에 태워 후송되고 남은 군인은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전진했다. 때는 2월이라 아직도 기온이 차서 날씨가 춥다고는 하지만 밤낮으로 전투를 하고 며칠을 잠을 자지 못하여 호를 파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인민군 시체를 베고 잤었다.



◆ 나는 중화기 소속이어서 살아났다.


아!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후송되겠구나. 낮에는 그라망(그러먼:미국 노스럽 그러먼 제작사의 F6F헬캣 전투기) 비행기가, 땅에서는 105mm포 사격과 80mm 화기중대 박격포 사격, 그리고 소총소대 공격으로 정상을 거의 탈환하는데 중대 인사계가 데굴데굴 굴러 내려와 보니 즉사하였다.
치열한 교전 끝에 아침에 고지를 점령하니 산 아래가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인민군은 기관총을 든 채로 죽어있어 발로 차니 그냥 쓰러진다.
아군도 1개 대대 병력이 1개 중대 수만큼 남아 있었고, 중대장은 무전기로 지휘하였다. 산위에서 보니 멀리 인민군 지휘부는 도망가고 있었고 지휘관은 잡지 못했다. 나는 중화기 소속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살아 남은 건 운이 좋아서였다. 우리는 기분이 좋아 만세를 부르고 춤추며 군가를 부르고 하산하였으며 이 고지를 방어하는데 1주일이 걸렸다.



◆ 살아남은 우리 소대병력은 소대장을 포함해 10명뿐이다.


70여 대의 트럭으로 인민군 병력을 보충하였다는 정보를 입수 오늘 내일 중으로 올 것을 예상 했는데 으스름한 저녁 무렵에 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해 왔다. 척후병이 15m 앞에서 인민군을 발견하고 기관총으로 사격하고 엄호하였으나 앞은 칠흑같이 캄캄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격 앞으로 ! 명령이 떨어졌고 사격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105mm 박격포가 앞에서 번쩍하고 섬광이 비치더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약 30분이나 되었을까? 일어나보니 주위는 조용한데 부대는 어디로 이동했는지 안 보인다. 그래서 남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뛰어 나갔다가 후퇴해 오는데 각 부대에서 패하여 후퇴하는 병력이 길을 메워 먼저 갈수 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인민군들이 뒤 따라오지 않았다. 그들도 군대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제 기린까지 나오니 트럭이 기다리고 있다. 밤중에 소속도 없이 제각기 혼자서 대구까지 왔는데 이 부대가 어느 부대인지도 몰랐다.
대구까지 가서 우리부대를 물어보니 철원 금화로 이동해 갔다고 했다.
대구 집결지에 철원으로 귀대해 오라는 방을 다음과 같이 붙여 놓았다. “9사단병력은 철원에서 재편하니 철원집결 요망”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카빈 소총을 메고 총알을 장전하고 철원행 군용차를 탔다.
철원에서 내리니 집결을 기다리는 안내소가 있어 2대대 8중대를 찾아가니 병력의 반 정도만 있는데 우리소대 전우는 10명뿐이었고 소대장은 살아 있어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 강으로 시체가 떠내려 간 후 물을 떠 와 밥을 해 먹었다.


3월쯤에 인제 합강리에서 물을 떠서 밥을 하려는데 물에 시체가 떠 내려왔다.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확인도 못 했지만 그 시체가 떠내려 간 후 물을 떠 와 밥을 지어 먹었다.
지금은 주부식이 충분한데 그때는 하루 굶는 것은 보통이고 산골에서 배낭에 옥수수를 넣어 생것을 씹으며 1주일 살아도 보았다. 배가고파 도로에 누워있으면 그냥 죽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높은 산 고지에서 주둔할 경우 미군 비행기에서 C레이션을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다행이 아군 진지에 떨어지면 밥을 굶지 않았으나 산 아래 인민군 진지에 떨어지면 인민군들이 주어서 배불리 먹으니 기가 찰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배가 고프면 하늘이 빨갛게 보여 하늘을 쳐다보며 이제 죽는 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휴가제도가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 고향과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다.



◆ 간부 후보생 교육을 받고 28기 공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금화 오성산에서 2개월 동안 방어와 예비 연대로 훈련을 했다. 그때 소대장이“양 하사 너 간부 후보생으로 가라”하여 나는 안가겠다고 했는데, 그 당시 소위는 소모 소위라 했으며 소위는 소대장인데 작전에 나가면 살아서 오는 소대장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대에도 관측장교로 초임 소위가 임관한 장교가 나가는데 살아서 돌아오는 소위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전우들이 여기 있는데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소대장은“상부의 명령이다. 적임자는 가야한다!”
결국 나는 상부에서 자꾸 가라고 권하여 전우들과 헤어짐이 참 섭섭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사단 사령부에 가서 구두 심사와 신체검사에 합격하고 필기시험도 합격한 다음 광주 보병학교에 25기로 입교 3개월간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았는데 매주 시험을 보고 성적이 몇 번 불량한 자는 원부대로 복귀했다.
교육이 끝난 후 병기, 병참, 공병대 시험을 보아 나는 공병대에 합격 경상도 김해에서 3개월 교육 받았는데, 기압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였지만 고된 훈련을 마치고 졸업을 하여 공병대 소위로 42명이 28기로 임관하였다.
졸업식장에서 같이 후보생으로 입교한 6명은 이름을 부르지 않아 나중에 알아보니 그들은 원부대로 복귀하였다고 했다. 1952년 8월 28일 임관하여 특별휴가로 10일간 양양 고향집에 오니 집이 불에 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