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청곡2리 김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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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93회 작성일 2018-03-1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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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환 (남, 83세, 양양읍 청곡 2리)
■ 면담일 : 2015.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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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가족이라 국군을 따라 피란을 가지 못해 고초를 겪었다.


청곡 1리 새잇말에서 출생을 하고, 양양인민학교를 2회로 졸업한 후 양양초급중학교에 입학하자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져 집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 했을 때 그때는 양양이 이북지역이라 유엔군 비행기가 폭격하고 군함에서 함포사격을 하니 피란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1·4후퇴 후 인민군 패잔병들이 산으로 해서 북으로 후퇴했다. 그때 공산당 인민위원장, 정치보위부 등은 북으로 갔다. 우리는 감곡리 뒷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동생인 김진해가 계속 울어서 슬쩍 뒤떨어져 집에 왔다.
집에 와 몇 일간 있으니 국군 수색대가 왔다. 그들은 우리 집 방을 사용하였다. 우리 집은 형인 김기환이 월남하여 공산당한테 감시도 당하고 있어 싫어했다. 또 형님은 첩보부대 요원으로 있었고, 또 4863부대 HID작전 참모가 우리 진외가 박학수 아저씨로 북에서 월남하기 전에는 인민군 장교였는데 전선에서 부대원에게“나는 월남을 하겠는데 같이 가지 않겠다면 너를 총으로 쏘고 갈 수 밖에 없다! 같이 가겠는가, 아니면 총을 맞을텐가?”하니‘같이 가겠습니다.’하여 부하를 데리고 1949년 귀순하여 첩보부대 작전 참모가 되었으니 우리 부모님은 밤만 되면 붙들려가서 고문을 당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국군을 따라 남으로 피란을 가야 하는데 나가지 못해 많은 고초를 당했다.



◆ 군인가족증명서를 보고 국군이 경례를 하고 갔다.


어느 날 비가 오는데 형님이 철모를 쓰고 비옷을 입고 왔다. 고성 앞바다에서 침투하다가 발각되어 총탄이 날아오는데 몇 명은 희생되고 겨우 모선으로 돌아와 살아 돌아왔는데, 다발총에 맞아 쪼그리고 앉지를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었다.
그 형님이 가면서 군인 가족이라는 증명서를 해 주고 갔다. 나중에 그 증명서를 국군이 왔을 때마다 보여주면 국군들이 경례를 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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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가족 증명서 】
저는 4863부대 김기환입니다.
우리 가족을 잘 보호해 주시길 바랍니다.
1951년 1월 일
육군 4863부대 대원 김기환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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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군이 또 후퇴할 때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우리 집만 피란을 가지 못했다. 그러니 인민군들이 쌀을 가지고 와서 우리 집에 밥을 해달라고 하여 밥 많이 해 주었는데 우리는 혹시 해코지를 할까봐 겁을 많이 먹었다. 그때 인민군은 대부대가 아니고 5~6명씩 나누어 다녔다.
그 후 국군이 들어왔을 때 그 증명서를 보여주면 거수경례를 하고 고생했다고 격려를 해 주었다.



◆ 비행기 폭격에 아궁이 고래에 들어갔다가 재강아지가 되어 나왔다.


다시 인민군이 처 내려와 강릉 촌에 피란을 갔는데 형이 혼자 찾아왔다.
당시 옷은 남루하게 입고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국군이 또 올 터이니 고향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 같이 피란을 가다가 우리는 고향으로 들어오고 같은 동내 이웃에 사는 김진만 식구는 부산까지 피란을 가서 지금도 누님의 가족들과 부산에 자리 잡고 살고 있으며, 형님은 부대가 해산되어 휴전 후 영장이 나와 국군생활을 했다.
밀고 당기는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미처 피란을 나가지 않았을 때는 주로 굴속에서 계속 살았는데 한때는 굴속이 답답해서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하자 부모님이 부엌 아궁이 고래로 기어들어 갔다가 폭격이 멈추자 밖으로 나오니 재강아지가 되었다. 밥도 비행기가 오지 않으면 집에서 해다가 굴속에 가지고가서 먹었다.



◆ 소년단장의 옷의 팔에는 빨간 줄이 3개가 있다.


학교에 가서는 5개년 계획을 승리로 맺자! 고 구호를 부를 때에는, ① 남여 평등권. ② 국유화 법령. ③ 토지 개혁(땅 분배) ④ ○○○○○ 등의 구호를 외쳤다. 나는 혼자말로 승리로 맺으려면 맺어라? 하였더니 누가 고자질하여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사무실 바닥에 꿇어앉히고 이것 저것 집안의 일에 대해 물었다. 나는 어떻게 말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뒷조사도 하고 며칠을 불려 다녔으며, 학교에서 모범생이라고 알려주어 큰 일없이 돌아왔다. 학교에서 소년단장은 옷의 팔에는 빨간 줄이 3개가 있다.



◆ 1달에 1회씩 세포위원장이 자아비판을 실시했다.


옥계까지 피란을 가서 좁은 방에서 20여 명이 들어가 함께 자는데 서로 엉겨 잠자고 고생스러워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고 하여 집으로 들어왔다.
피란민 속에 인민군이 숨어 있다고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으며, 어떤 아이는 죽은 엄마에 등에 업혀 울고 있어도 내가 죽겠으니 마음이 짠해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현재 양양정형외과 맞은편 현대전기 건물 뒤에는 예전에 산이 있었는데 인민군이 그 산위에 토치카를 만들어 놓고 지키다가 국군이 오면 기관총으로 사격했다. 주위는 방공호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인민군은 집집마다 부역을 할당하여 부모가 못하면 아들이 대신 나가서 굴을 파는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1달에 1회 세포위원장 주관으로 자아비판을 하는데 자기의 잘못을 비판하지 않았다가 만약 다른 사람이 발각하여 끄집어내면 호되게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