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성내리 원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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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65회 작성일 2018-03-1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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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태수 (남, 83세, 양양읍 성내리)
■ 면담일 : 2015.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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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를 미리 캐서 먹고 덜 익은 보리를 닦아서 먹었다.


6 ․ 25한국전쟁 시 양양고급중학교 2학년 때이다. 북한의 교육체계는 인민학교 5년, 초급중학교 3학년, 고급중학교 3년, 대학교 4년이다. 나는 키가 작아 큰 이익을 보았다. 학교에는 민청이 있고 인민학교는 소년단이 조직되어 있었고 사회에도 민청이 있었지만 나는 양쪽 다 들지 못했다.
1946년 토지개혁을 하였는데 토지를 5정보이상 가진 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하고 현물세를 받아가 빈곤하게 살았다. 아침은 밥은 먹고,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은 죽을 먹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토지를 분배받으면 잘 살줄 알았는데 더 궁핍해졌다. 여름엔 감자를 미리 캐서 먹고 보리도 덜 익은 것을 닦아서 찧어 먹어 보리 고개란 말이 있다.



◆ 양양인민학교에 인민군이 주둔했다.


북한은 1950년 전쟁 2~3개월 전부터 군수품이 수송돼 와서 금융조합(현농협중앙회양양군지부자리)에 자리에 쌓아놓았고 양양인민학교에는 인민군이 주둔했고 농협자리는 군부대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군인들과 아주머니들이 일하고 있었으며, 우리 어머니도 같이 일하고 있었다.
장교식당 감독자는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인데 우리에게 누룽지를 가져다주어 많이 얻어먹었고, 자기의 소지품 보따리를 우리 집에 가져다놓았는데 이동할 때 그냥 갔다. 당시 우리 집 앞에는 양양면사무소가 있었고, 그 옆에 현 양양천주교회 디모테오 어린이집 놀이터 자리에는 영화관이 있었다.



◆ 키가 작아서 군대도 가지 않았고, 나이도 4살이나 낮추어 말했다.


6 ․ 25전쟁이 일어나자 학교 게시판 지도에는 매일 전황을 게시하여 오늘은 주문진 해방, 또 오늘은 어디 해방이 되었다고 표시하면 학생들은 그것을 보고 박수와 환호를 하고 곧 남조선이 해방될 것이라 했다.
남쪽에서 전황이 안 좋아 후퇴할 때는 게시판에 표시를 안했다. 그러면서도 학교는 계속 다녔다. 나는 아버지가 팔을 크게 다쳐 내가 농사일을 해야 하니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어 러시아어가 담당인 담임선생님에게 사정을 말하니 퇴학이 아닌 휴학을 하게하고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학교에 오라고 해주셨다.
나는 학교에 안가니 군대에 잡혀가지 않았고 동네에선 학생이라고 안잡히고 하여 군대에 안 갔다. 또 키가 작아 제외되었다. 그래서 나는 키가 작기 때문에 두 가지 혜택을 보았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학생들을 군인으로 뽑았는데 연창리 김영환, 그리고 오늘은 또 누구누구를 이렇게 자꾸 뽑혀 가는데 나이가 17세인 나는 키가 작아 제외되었다. 길거리에서 잡으면 나는 13살 이라고 4살 낮추어 말했다.



◆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에 떠밀려 마지못해 통천까지 피란을 갔다.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자 국군의 반격으로 인민군이 후퇴하며 양양에 들이 닥치자 할 수없이 통천까지 피란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병환이 있어 어머니가 일을 해야만 했고 나도 같이 도와드렸다.
미군 비행기가 폭격할 때 산으로 피신, 비행기만 뜨면 북문 쪽으로 나가 청곡리 산 쪽으로 피란을 가면서 우리 집 쪽을 바라보니 비행기의 공습으로 집 앞에 있던 극장, 면사무소, 금융조합 등 큰집들이 화재가 났는데 그 사이 성내리 몇 집과 우리 집도 화재를 당했다.
산에서 돌아와 안 탄 집에 방 1칸을 얻어 살다가 회룡리 외가에 동생과 같이 피란을 갔다. 집에 있으면 내무서원이 찾아와 잡아가려고 해서 피해간 것이다. 밥하는 취사장에서 밥을 하면 어디로 운반해 가는지 가지고 갔다.
우리에게 밥도 주고 누룽지도 주고 밥하는 사람 중에 40여 세 정도의 나이를 가진 책임자는 갈 때 밥하던 솥을 주고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 묘지 옆에 나뭇가지로 하늘을 가리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


1 ․ 4후퇴 시 도화리에 피란을 갔는데, 아버지가 병환중이라 멀리 가지 못했다. 그리고 먹을 게 없어 돌아왔는데 사람들은 먼저 돌아와 현 양양천주교회로 올라가는 비탈 길 오른쪽 옆에 있었던 방공호에서 기거하였다.

그때 성내리에서 화재를 면한 집은 조산집(최돈성), 피양집(○○○), 그리고 김주봉씨 집 등 몇 집이 남았고 양양 읍내가 모두 화재를 당하였다. 식량은 피란을 갈 때 땅에 묻고 갔는데 그냥 남아있어 꺼내 먹었다.
또 2차 피란을 도화리로 가니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와있는데 집이 없으니 묘지 옆에 나무 가지로 하늘을 가리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 아버지는 병환이 심하여 음력 1월 26일 사망하셨는데 장례를 치루려니 엄두가 나지 않아 아는 아저씨들에게 연락하니 와주셔서 장사를 치러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