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남문3리 한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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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67회 작성일 2018-03-1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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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재덕 (남, 88세, 양양읍 남문3리)
전 대한민국 6 ․ 25참전유공자회 양양군지회장
■ 면담일 : 201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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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산공원 굴에 받침 동발이 나무를 남양리에 가서 싣고 왔다.


북한 함경남도 장진호가 고향인데 형은 교사이고, 누나는 함흥에서 화물차로 목재를 운반하는 사업을 하였다. 19세 때 누나의 차로 목재를 나르는 차를 따라 속초에 왔다.
하루는 인민군들이 나를 보고 자동차를 운전해 달라기에 그들의 화물차로 상평에서 박격포탄과 탄약을 싣고 강릉으로 갔다 돌아오니 이번엔 돼지를 싣고 강릉으로 가자고 한다. 그래서 돼지 10마리를 실었는데 강릉을 가니 9마리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한 마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전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해서 인민군들이 시키는 일을 마치고 나니 이번에는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다른 차로 끌어서 시동을 걸어 청진까지 가서 차는 거기다 놓고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집에 숨어 지내는데 내무서 경리계장이 나에게 오라고 연락이 왔다. 나에게 현산공원에 굴을 팠는데 굴에 받침 동발이 나무를 남양리에 가서 싣고 오라고 하여 동발이 목재를 실어다 주었는데, 당시 인민군들은 굴에 동발이 나무를 받치고 낮에는 굴속에 들어가 업무를 보거나 숨어있었는데, 아마도 미군 비행기의 폭격 때문에 굴에서 숨어 있었을 것이다.



◆ 미군 깜둥이들이 쳐들어오면 사람들을 막 죽이니 조심하라.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미군 깜둥이들이 쳐들어오면 사람을 막 죽인다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여 서문리에서 임천리로 가는데 청곡리 최성호씨를 만났다.
“야 ! 너 뭐야!”
“예, 저 피란을 가는 중입니다.”
“그러면 나 따라와!”라고 하여 최성호씨를 따라 감곡리로 가서 10월 2일 거기서 며칠을 있다가 나와 철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데 국군들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국군이 오는 걸 환영해야지 왜 피란을 가느냐고 한다. 그래서 국군의 짐을 지고 고성군 토성면 천진까지 가니 이제는 집에 가도 좋다고 해서 집에 돌아오니, 차에는‘제1군단 정보처’란 간판이 붙어있었다.



◆ 울산바위 전투에서 머리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적을 소탕했다.


양양에서 살다가 군속으로 첩보원이 되어 청진으로 투입되었다. 1951년 1월 흥남철수를 할 때 아가리 배인 LST를 타고 묵호에 내렸다.
당시 나는 제1군단 정보처 첩보부대원 10명과 함께 들어가 흥남에서 17~18세인 학생들 50명을 데리고 흥남철수 하는 배에 탔다. 그때 LST를 타지 못한 바닷가 사람들은 자기 집 고깃배를 타고 역시 월남하였다.
1952년 2월 울산바위 전투에 나가기 전 나는 21세의 나이로 남에 빈집에 들어가 명주바지 저고리를 찾아 입은 사복 차림으로 나이가 17~18세인 소년 사병들과 11명이 설악산 울산바위 아래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매복을 하고 있던 인민군이 다발총과 기관총으로 공격을 하며 기습을 하자 우리도 대응사격을 하며 교전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때 총탄에 맞은 줄도 모르고 진격해 들어갔는데 적을 소탕한 후 1등 병이 내 머리에서 피가 흐른다고 하여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총탄이 머리를 치고 지나가 제59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환자가 밀려 대구 제3육군병원에 갔다가 왠지는 모르지만 다시 동래 31 육군병원에서 2개월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몸이 돌아가고 틀어지며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고 하면서 당시 육군병원에서는 고치지 못한다고 하여 제대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