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연창리 김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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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62회 작성일 2018-03-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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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식 (남, 79세, 양양읍 연창리)
■ 면담일 : 201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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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기의 공습으로 논바닥 벼이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인공 때 당숙이 월남했는데 신고를 안 해서 아버지께서 현 KT양양지점 건물 옆에 위치하고 있었던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당했다.
1950년 7월 23일부터 양양에는 공습과 함포사격이 심해 소개령이 내려지자 양양사람들 중 일부가 거마리로 피란을 가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해 추석 무렵 미군 비행기가 현북중학교를 공습할 당시 우리가 다니던 상평인민학교도 공습을 하자 학생들이 모두 방공호로 대피를 했다가 공습이 뜸해지자 집으로 가기 위하여 거마리 굴 앞을 지나 철둑으로 가는 도중 또 미군기가 기총소사로 공격을 하자 우리들은 재빨리 철둑 밑 논바닥으로 기어 들어가 벼이삭 속으로 납작 웅크리고 들어가 숨었다.
나중에 미군기가 사라진 후 논에서 나오려고 하니 다리가 말을 잘 안듣는 것 같아 다리를 보니 파편이 배겨있었다. 같이 숨었던 7~8명의 학생들의 부축을 받고 다리를 끌고 집에 가서 된장을 발랐으나 빨리 낫지 않았고 얼마 후 상처가 덧나 한참동안 심한 고생을 했다.



◆ 인민군들이 골이 패인 함석 위를 긁으면서 총소리를 흉내 낸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는 시기에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할 당시 양양지역으로 북상하던 인민군들이 양양군청 뒷산의 느티나무 뒤로 죽 늘어서있는 방공호에 약 1개 중대병력이 진을 치고 사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국군이 월리 뒷산에서부터 총격을 가하면서 맹렬하게 밀고 들어오자 인민군들은 후퇴를 하기 위하여 인민군 1개 중대 중 약 1개 소대가 본대의 후퇴작전에 시간을 벌어주려고 방공호에 남아서 힘겹게 방어를 하다가 총알이 다 떨어졌는지 골이 폐인 함석쪼가리에다 쇠꼬챙이 같은 걸로 북북 긁어 대면서 총을 쏘는 척 하며 소리로 흉내를 내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 대열 속에서 도망을 쳤다.


이때 방공호를 사수하는 인민군들을 제외하고 본대의 인민군들이 우리집 식구를 비롯한 동내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북으로 들어갔는데 우리 집식구들과 일부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인민위원장과 여맹위원장의 설두하며 다구 치는 바람에 거부하면 잘못 될 것 같아 마지못해 따라나서게 되었다.
성내리 붕근[북문:北門] 넘 고개를 넘어 청곡리로 해서 감곡리를 지나 금풍리와 사교리를 지난 다음 대문턱(석교리)으로 해서 상복리에 이르자 후퇴하는 대열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 감시가 조금 뜸하고 느슨한 틈을 타 상복 마을 산으로 숨어들었다.
얼마동안 숨어 있다가 주위가 잠잠해지자 우리 식구들은 산길로 도망을 나오다가 미군 정찰기에서 뿌린 삐라를 주어가지고 길로 들어서는 순간 부상을 당해 다리를 질질 끌고 가는 인민군들을 마주쳤으나 그들은 우리 집 식구들을 보고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제 몸 조차도 가누기가 힘든 처지라 그냥 무사히 통과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국군들이 우리 집 가마솥에 소를 잡아 끓여 먹고 있었다. 내가 미군정찰기가 뿌린 삐라를 보여주자 그 국군들이 집을 비워주었다.



◆ 울진에서 나무 한 짐을 해 팔아 쌀 1되를 받았다.


1 ․ 4후퇴 때 헌병들이 남쪽으로 피란을 가라고 해서 주문진에서 1박을 하는데 눈이 엄청나게 내려서 피란 온 우리들은 여러 가지로 힘들게 했다.
피란민들이 사천리에 오는데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어뜨려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것은 피란민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것이라 했다.
밤재(강릉시 옥계면 낙풍리와 강동면 산성우리에 접한 고개)에서는 인민군들이 무기와 돈도 다 버리고 도망가는데 붉은 북한 돈이 눈 위에 뒹구는 것도 보였다.
우리가족은 삼척을 지나 피란을 가면서 중간에 민가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으며 나갔다.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 3명을 합해 7식구는 끼니를 때우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면에 신고를 하면 알랑미(안남미)를 식구 수대로 1되씩 주는데 그것을 오래 먹으려고 죽을 쑤어 먹었다.

최종 목적지인 울진 죽변 화성리에서 짐을 풀었다. 그러나 피란생활을하면서도 밥은 해먹고 살아야 하니 산에서 나무를 해다 죽변에 내다 팔아 식량을 샀는데, 나무 1짐이면 쌀 1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행방을 알 수가 없이 사라져 애타게 기다렸다. 그렇게동생들과 어머니와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 당시 16세인 내가 나무할 곳도 마땅치 않아 양양으로 들어오면서 주문진 민가에 들어가 1박을 하게 되었는데 윗방이 너무 추워 도저히 잘 수가 없어, 가만히 아랫방에 내려가 끼어 자고 아침밥도 얻어먹고 잠도 자고 하니 주인이 염치가 좋다고 하더라.



◆ 아버지가 탄약운반 짐꾼으로 고성 건봉사 전투에 참여했었다.


왕도에 와서 어머니 이모 댁에서 며칠을 묵고 있는데 3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길에서 군인들을 만나 짐꾼으로 고성 건봉사 전투에 탄약을 지고 고지에 운반하는 일을 하며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했다. 부대에서 증명서를 해주고 헌병이 태워다 주었다고 했다. 정말 전쟁에 나가 돌아가신 줄알고 할머니는 매일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가 통하신 것 같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집은 모두 타 없어지고 피양(평양)집 등 몇집만 남았다. 우리는 성내리 군청 뒤에 토막집에서 지냈는데, 그 토막집은 전쟁 전에 사랑방에 살던 사람이 먼저 와서 집터 구들장 일부에 움막집을 짓고 살았고, 나머지 구들장 터는 주인집이 지을 수 있게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 사랑방 집은 나중에 시장에 기름집을 내고 우리는 그 집 방 2칸과 부엌 1간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