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청곡1리 추두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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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90회 작성일 2018-03-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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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두엽 (남, 88세, 양양읍 청곡 1리)
■ 면담일 : 2017.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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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간 형들은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양양보통학교 5학년 때 해방이 되었고 북한 정치에서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할아버지가 공산당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나도 공산당을 싫어하게 되었다.
벼농사는 논이 빠지는 수렁논이라서 소로 갈지 못하고 쇠스랑으로 논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 놓으면 인민군이 다 가져가고 남는 것이 적으니 싫어했다.
또 17세인 누나는 민청에서 밤을 세워가며 학습을 시키고 새벽에 집에 돌아왔다. 나는 15살로 조국보위 훈련을 한다고 목총을 가지고 총검술을 배웠는데, 남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도 섞이어 같이 훈련을 했다.
1950년 초엽에는 약 500여 명이나 되는 청년들을 조산국민학교에 모이게 한 다음 옛날 목욕탕 솥처럼 생긴 큼직한 솥을 걸어놓고 밥을 해 먹여 가며 각개전투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서 이제 부산만 남았으니 남조선도 곧 해방을 시킬 수 있으니 우리 모두 전투에 나가자! 고 선동했다.

얼마 후 훈련 받은 500여 명의 청년들은 원산으로 올라가서 열차를 타고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갔는데 그때 우리 동네에서도 15명이나 갔지만 나는 어리다고 내년에 나가라고 하면서 집으로 보내주었고 그 때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간 형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 동호리 기차 굴속에 피란민들이 모여 있었다.


10월이 되자 국군이 양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청곡리 김기환과 함께 치안대에 입대하여 양양 감리교회 마당에서 약 5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받았다.
후에 대원들이 150여 명이 되자 소대를 편성하여 양양국민학교 교실에서 침식을 하다가 다시 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6개월간 다니며 훈련을 받았다. 그 후 방위대에 편입되어 설악산에 파견되어 민가에 내려와 민간인들을 괴롭히는 공비들을 잡는 임무를 받았다.
그해 국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이 처내려오자 12월말 국군이 후퇴를 하면서 북에서 다시 내려오는 인민군이 들어가 사용한다고 집집마다 불을 싸 놓으면서 1 ․ 4후퇴가 시작되었다.
그때 어떤 부대 소령이 불을 놓으라고 해서 강현면 방아다리, 적은리, 방축리를 태우고 내일은 감곡리와 우리 마을을 태울 차례인데 우리 집은 남에 손에 맡기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태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하루전날 미리 태울까도 생각하였지만 이튿날 태우려고 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이 생겨서인지 우리 마을은 태우지 않고 바로 후퇴하여 우리 집은 화재를 면하였는데, 그때 미리 태웠더라면 큰 일이 날 뻔 했다.
그러나 불을 태웠던 다른 집들은 논바닥에 터를 잡고 문짝으로 가리고 생활을 하니 안타까웠지만 우리 집은 다행이라 했다. 1 ․ 4후퇴 당시 국군부대는 우리에게 말도 없이 후퇴하여 우리 대원 7명은 나중에 후퇴하여 인구에 나가서 본대에 합류 할 수 있었고, 나는 이때 우리 부대 이름이 4863방위부대라는 걸 거기서 알았다.
우리 부대는 강릉까지 후퇴하였다가 전열을 갖춰 다시 북진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피란민들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지만 우리 부대는 북쪽으로 진격해 갔다. 그러나 그해 눈이 많이 와서 바닷가 동호리에서 밥을 해먹으면서 묶게 되었는데 북으로 들어오면서 보니 동호리 기차 굴속에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 국군으로 위장한 인민군의 기만술에 속아 대원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대원들에게는 부대 소대장이 수류탄 2개와 M1소총과 탄알 40발을 부대원들에게 지급해주어 어깨에 메고 동료 6명(청곡리 추두엽과 임명우, 감곡리 김순응, 송암 이기한, 상운리 윤상덕, 양혈리 김희중)과 북진을 하는데 눈이 많이 내려 힘들게 감곡리로 들어오니 눈은 가슴께까지 찼다.
대원들은 눈을 헤치고 감곡리를 지나 청곡 5반(당시 간동리)에 있는 남영이네 집과 무만이네 집에 나누어 들어가 묶고 있었는데 아침 절에 7명의 인민군들이 국군옷차림으로 위장하고 총에는 태극기를 꽂고 신발에는 설피를 신고 무만이네 집으로 들이 닥쳤다.
그때 우리대원들은 막 아침밥을 먹으려는 참이었으나 우리는 그들을 향해 손들어! 하고 소리를 지르니 위험한데 총을 치워, 국군동무인데 총을 겨누지 마라! 우린 증명서 다 있어! 하는 그들의 기만술에 속아 넘어가 국군이 왔다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순간 동무하는 소리를 듣고 임명우가 수류탄 핀을 뽑으려는데 그자들이 먼저 총을 쏴서 수류탄을 안고 앞으로 꼬꾸라져 죽었고, 윤상덕도 총에 맞아 죽었다. 그때 안방에 있던 무만이 작은 아버지는 남자의 낭심에 파편을 맞아 다치고 조카는 손가락이 절단되었다. 다친 조카는 나중에 닭을 두 마리나 잡아 절단 된 손가락에 생닭 살을 처매고 치료를 하였다.
그때 나는 재빨리 눈치를 채고 깊은 눈 속으로 파고 들어가 숨었지만 다른 한명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남영네 집에 있던 다른 대원 3명은 총으로 개를 잡아먹고 까마귀 등을 잡는데 총알을 다 쓰는 바람에 총알 3발 밖에 남지 않아 총을 제대로 쏴보지도 못하고 잡혀갔다.
인민군들은 대원3명을 끌고 가다가 감곡리 방면의 굴속에서 총으로 쏴죽인 것을 나중에 확인 할 수 있었다. 결국 인민군들의 위장술에 속아서 전부 몰살당하고 나만 눈 속에서 살아났다. 그때 내 나이 17세였다.



◆ 청대리에 침투하여 적정을 살피고 사람까지 데리고 나오라고 한다.


사고 후 우리 대원이 당한 것을 알고 삽존리에 주둔하고 있던 김기한이 찾아와 상황 파악과 사고 경위를 조사한 다음 나와 같이 부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장이 나를 보고“너 이북에 한번 갔다 오라고 하면서 만약 못 간다고 하면 총살이다.”라고 하며 상관의 권위로 명령을 하면서 겁을 주려고 한 것인지 호통을 친다.
그리고는 부대가 삽존리에서 금풍리로 이동하더니 나에게 민간인 복장을 하고 북한 증명서도 만들어 주고는 무기인 총과 대검은 주지 않고 북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인민군이 어디에 몇 명 있는지, 포가 몇 문인지 알아오고 사람까지 데리고 나오라고 했는데 그때 최전방은 속초 청대리였다.
나는 청대리에 가서 함석집을 찾아들어가 그 집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밥을 잘 해주면서 주인아주머니가 큰절을 하며 잘 대해 주어 그집 아이는 못 데리고 가고 바로 그 옆집으로 가니 마침 14살짜리 남자 아이가 있어 그 아이를 보고“내가 길을 모르니 나를 안내해 달라”고 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그 집 엄마가 맨발로 산 중턱까지 쫓아와서 애를 못 데려 간다고 하여 애를 먹었다.
나는 그 아이와 부대에서 같이 지냈는데 두 번째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데리고 나왔던 14살짜리 아이와 그리고 부대원 1명을 더 데리고 3명이 고성 운봉산 근처로 들어가니 인민군 집결지와 사방으로 인민군초소가 즐비하다.
그리고 몸을 가볍게 하려고 옷도 벗어 버리고 간편하게 하고 신평리까지 뛰어 국군 1중대에 내려가니 초소에서“손들어!”라고 할 때 내가 어물어물하니“왜 어물어물하느냐? 인민군이야.”하며 소리를 쳤으나 그 초소병은 바로 우리 신분을 알아차린 것 같았는지 들어오라고 한다.

나는 바로 보초와 같이 가서 대장에게 적의 주둔지규모와 동태를 보고하자, 국군 1중대에서는 인민군의 대부대로 확인이 되었는지 천진리로 후퇴하고 바닷가 까지 철조망을 치고 그 앞에서 암호만 틀리게 대면 위협사격을 해댔다.



◆ 침투지역에 집들도 썩었고 문패도 없어서 증거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세 번째 명령은 미시령과 진부령 사이인 신평위에 있는 새이령에 가서 적정을 탐지하고 오라고 하여, 오후 4시에 저녁을 먹고 청곡리 정춘영과 감곡리 최돈자와 함께 갔다.
부대에서는 최종 목적인 적의 주둔지의 인민군병력의 숫자와 보유하고 있는 각종 무기종류와 수량 등을 알아 오는데 꼭 그 증거가 되는 표식을 가져 와야 한다고 했다.
부대원들은 인적이 없는 길을 따라 새이령으로 올라가니 집들은 썩어서 문패도 없어 증거를 구할 수가 없어 또 다른 곳을 수색하니 마침 집 한 채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엎드려 숨어서 지켜보니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가 내려온다.
그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인민군 9명은 지금은 보초를 서러 나가고 방에는 다친 환자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아주머니를 막 드려 보내자 방안에서“밖에 누구요?”하고 소리가 나자 아주머니는“아무 것도 아니래요.”하고 대답한다.
우리는 작은 소리로 저 놈들의 총이라도 빼앗아 가려고 숨어서 살피니 그들은 손으로 총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 사고를 당하지 말고 그냥 갑시다. 하고는 밤중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고 혹시 지뢰를 매설했거나 방향감각을 잃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민군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갈까봐 오던 길로 내려 왔다.
가랑잎이 가슴까지 차고 여우가 짖어 개울에 빠져 옷이 젖고 산길을 달리다보니 밤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앞에 서있는 회초리 같은 나무가지가 눈을 때려 눈이 아플 때도 있었다. 그러나 캄캄한 야밤이라 쉬지도 못하고 산 아래까지 정신없이 내 달려 HID 제2지대에 도착했다.
이렇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적진에 침투하고 돌아오니 집에 가라고 보내 주었다. 지금까지 적지에 침투했던 것은 군번도 없이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집에 와 있다가 다시 국군에 입대 영장을 받고 논산 훈련소 제22연대에서 훈련을 받고 6사단에 부대 배치되어 말년에 연대 주번사관까지 하고 제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