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11월 : 현북면 법수치리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다 !

페이지 정보

조회 1,022회 작성일 2019-01-16 15:34

본문

법수치리(法水峙里)는 마치 佛家의 法水를 색출한 것 같다고 하였으며, 김시습이 이곳에 머문 이유도 예부터 山水가 수려하고 地勢가 깊어 암자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양양의 지명 유래에 의하면 마을 입구 강가에 운문암(雲門岩)이라고 암각 된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부근에 있던 庵子이름을 김시습이 지었다고 하니 이 마을과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김시습은과연법수치리어느곳에머물렀을까?


1 (91).jpg


▲ 법수치리 계곡



마을 입구 진흙둔지 건너편 바디 재에 옛날에 암자가 있어 절터 골이라 부르며, 참 진흙이 많다는 토골(土洞)에 탁인헌(卓仁憲) 효자각 부근에는 지금도 용화사(龍華寺)라는 절이 있다.
토골을 지나 개잔이물내치기와 진흙둔지, 본동, 미능골을 지나면 길가에 쌍덕이라는 화전민이 살았다는 쌍덕폭포가 있는데 지금은 대승폭포라고 부른다. 김시습이 세조의 등극을 배타하여 세상을 주유할 때, 이 폭포 높이가 30m나 되었고 운치가 좋아 수일간 머물렀다고 전한다.
대승폭포를 지나 검달골(黔達谷) 굴아우 계곡 언덕에 전에 안현준 이라는 사람이 살던 집터가 김시습이 머물던 집터라는 설도 있고, 팥밭목이(豆田項)를 지나 서쪽으로 약 4km쯤 廣佛里에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법수치리에는 庵子와 관련된 지명, 옛 절터와 집터 등 김시습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어느 곳에서 머물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성전리 망월산에 고려 목종 12년에 창건한 명찰 명주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마을 여러 곳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유추해 본다.




매월당김시습의생애


1 (92).jpg


▲ 김시습이 머물던 집터와 효자각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한양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3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5세 때 이미 시를 지어 신동(神童)으로 전한다. 세종대왕이‘오세(五歲)’라는 별호를 내렸다.
그러나 21세(1455)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후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찬탈을 하자,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 승려가 되어 유랑하였다. 이때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담아 노량진에 임시 매장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31세(1465·세조 11)에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입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만복사저포기』등 5편이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있고, 수많은 시편들을『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47세(1481년·성종 12)에는 다시 安氏라는 아내를 맞고 환속하였는데, 이듬해 예상치 않던‘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벌어지자 또다시 승려가 되어 관동지방을 찾게 되었는데, 이 무렵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1486)과 교분이 깊어, 법수치리 검달골(黔達谷)과 설악산에 머물며 자연을 벗 삼아 쓴 100여 편의 시가『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다.




명암이해조의『명암집』6권, 峴山三十詠에양양에은거(隱居)한기록


양양부사 이해조(1709·숙종 35)는 재임 시 양양의 아름다운 명소 30곳을 엄선하여‘현산30경’이라는 시문을 남겼는데, 그중 제23경, 24경, 28경에 양양에 은거한 기록이 있다.
제23景봉정암(설악산) 편 서문에“봉정(峯頂) 아래 이 십리 정도에 십이폭포가 있고, 서쪽엔 梅月堂金時習이 살던 옛터가 있다.”라고 하였고, 제24景沙林寺(선림원지) 편에“절 앞의 돌비에는 곧『梅月堂集』에 王羲之의 글자체로 홍각선사(弘覺禪師)의 행적을 기록했다.”라고 했고, <.....중략>
제28景검달동(黔達洞) 편에 黔達洞在府南八十里山谷間絶險處疊●環擁人迹罕到卽梅月堂舊隱處遺址尙存俗傳五歲童子基云“검달동은 부의 남쪽 팔십 리 아주 험준한 산골에 있다. 첩첩한 산봉우리가 빙 둘러안고 있어 인적은 드물다. 즉 매월당 김시습이 옛날 수년간 수학하며 은거하던 곳으로 살던 터는 아직 남아있다. 속세에 전하기로는 오세의 어린 동자가 살던 터라 한다.”라고 기록했다.




『매월당집·율곡집』에양양부사유자한과의友情을보면


1 (93).jpg


▲ 대승폭포와 운문암


○ 양양부사 유자한의 재임기간에‘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등여섯 편의 書信文이 실려 있다.
○ 유자한 부사가 梅月堂의 後嗣를 걱정하여 上京時양양의 官妓가운데 소동라(所冬羅)를 同行시켰다. 友情에 못 이겨 데리고 가기는 했으나 얼마 간 있다가 노자(路資)를 주어 양양으로 되 내려 보냈다.
○ 유자한이 양양부사로 있으면서 공을 예로 대접하고, 다시 세속 살림을 회복하기를 권하니, 공이 편지로 사절하여 말하기를“장차 긴 삽을 만들어서 복령(茯●)과 백출(白朮)을 캐고, 一萬나무에 서리가 맺힐 때에 仲由(孔子의 제자 子路)의 무명옷을 기워 입고, 一千山에 눈이 쌓일 때 王恭(晉의 前將軍)의 학창의(鶴●衣·학의 털로 만든 갑옷)를 떨쳐입으려 한다. 낙백(落魄·뜻을 이루지 못함)하여 세속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년 뒤에 나의 본 마음을 아는 이 있기를 바라노라”하였다. <飜譯;鄕土史硏究所又泉李鍾●>
매월당 김시습은 단종이 폐위되자, 淸節之士로 절의를 몸소 실천하면서 양양의 법수치리와 설악산에서 초연히 유랑하며 오랫동안 물렀던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