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7월 : 국내 최초 校界(교계) 각자(刻字) 현북면 장리 연화동서 발견하다.

페이지 정보

조회 937회 작성일 2019-01-16 17:26

본문

校界(교계) 각자(刻字)의발견동기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는 지난 2013년부터 지역내 금표(禁標)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북면 장리 노루골길 소하천 상류지점인 달하치와 연화동 갈림길 냇가 반석(磐石)에서 글자를 발견하였다.
최초 발견과정은 양양향토사연구소 연구원이 2013년 8월 중순경 교계 암각문(岩刻文)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찾기 위해 장리 연화동(蓮花洞)에 거주하는 신성균(남 당시67세)댁을 방문하였다. 이 때 신성균은 예전에 그곳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촬영한 校界(교계)사진 한 장을 제공하면서“현재는 바위에 새겨진 글자가 수해로 매몰 되었다.”고 했다.
이를 근거로 두 차례에 걸쳐 양양문화원과 향토사연구소 합동으로 발굴 작업에 임했는데, 당시 암각문(岩刻文) 상태
는 연화동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세월교(洗越矯) 가설공사와 그동안의 수해로 바위와 토석이 쌓여 이를 제거 하느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극복하고 2013년 9월 3일‘校界’라는 글자를 찾아냈다.


1 (77).jpg


▲ 현북면 장리 연화동



校界(교계) 각자(刻字) 의미(意味)는무엇인가?


校界(교계) 각자의 사전적 의미는 교계(校界)라는 글자를 바위에 파서 새긴 것을 말한다. 라 했으나, 校界(교계)에 관한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마침내 유수대학교의 교수를 초청 학술토론회를 개최한 결과 교계(校界)와 금표(禁標)는 일정한 구역 안으로 함부로 드나들지 말 것을 알리는 표시라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를 기록한『한서(漢書)』성제기(成帝紀)에 이런 주석 (註釋)이 있다. “이 校(교)라는 것은 말뚝을 서로 꿰뚫어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라 하였고, “교렵(校獵)은 울타리를 크게 둘러 짐승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고 사냥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교(校)와 교렵(校獵)에 관해 상세하게 당나라의 초기의 학자 안사고(顔師古)는 주석에서 그 내용을 밝혔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유원(李裕元)의 문집 임하필기 전모편(林下筆記典謨編) 변방의 방비를 보면 "신립장군(申砬將軍)이 평상시 철갑 기병 500여 명을 조련하여 교렵(校獵,사냥)이란 이름으로 전투를 익히게 하였는데, 강가를 치달리고 민첩함과 빠르기가 마치 신과 같으니 호인(胡人)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하였다." 란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교렵(校獵)은 사냥대회로 짐승을 일정한 곳에 몰아 놓고 무기를 사용하여 사냥을 하는 군사훈련이었다.
목민심서(牧民心書)권8 연졸 제2조에 의하면 "연졸(練卒)이라는 것은 무비(武備: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의 중요한 일로써 조연(操演:훈련하다)과 교기[敎旗:중국 명나라의 병술가 모원의(茅元儀)는 평상시 조련하는 법으로 옛날의 교렵이 곧 이 뜻이다]하는 것이다."라 했다.
위를 종합할 때 이곳은 산악으로 지세가 작전하기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 실전적응 훈련장소로 알맞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고 조련(調練)하던 교렵장(校獵場,군사훈련장)도 노루가 많은 이 연화동 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짐승을 잡는 사냥터 및 조련장(操鍊場)은 위험이 늘 상존함으로 이를 알려 사고예방차원에서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계곡이나 도로변에 오랫동안 훼손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바위에 校界(교계)를 새겼다고 보며, 그 어원(語源)은 교렵장 경계(校獵場境界)였는데 약칭으로 교(校)자와 계(界)자를 합성 校界(교계)로 표기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난 2016년에는 강원도향토문화 연구논문발표대회에서‘교계와 금표의 동질성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우수상을 수상한바있으며 특히 이번 논문발표를 통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校界(교계) 각자(刻字)가 국내 최초로 양양에서 발견되었다는데 대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 (78).jpg


▲ 연화동과 달하치 입구



1 (79).jpg


▲ 교계 각자



1 (80).jpg


교계 발굴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