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5월 : 양양해변(襄陽海邊)에 조선시대 봉수대(烽燧臺)는 4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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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47회 작성일 2019-01-1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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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제의시원(烽燧制始源)을알아보다.


봉수제의 유래는 중국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이미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가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 31년(1149)부터이다. 고려이후 조선 전기의 봉수는 봉화(烽火)라고도 하는데, 대략 수 십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후망(●望)의 요지가 되는 곳에 연대(烟臺)를 축조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煙氣)로 변경(邊境)의 급보(急報)를 조정(朝廷)에 전달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通信手段)이다.
세종은 집권초기부터 중국 및 고려시대 때 운영되었던 봉수제도를 참작하여 각 도의 망보기 좋은 산봉우리에 연대(煙臺) 또는 봉수대를 높이 쌓고 근처에 사는 백성 10여 명을 모집하여 봉졸(烽卒)로 삼아 매번 3인 1조로 편성하여 병기를 가지고 항상 그 위에서 주야로 정찰하며 5일 만에 교대하게 하고 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급히 보고토록 하였다.
봉수는 경봉수(京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 등 3종류가 있었는데,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써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도 불렀다. 연변봉수는 해륙(海陸)변경의 제일선에 설치되었고,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써 전국 어디서나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각 경로를 통해 서울 남산에 약 12시간이면 도착 조정에 전달되는데, 강원도는 제1로로 함경도 경흥→강원도→경기도→양주 아차산봉수로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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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 봉수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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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대포 의옹치)



양양해변의봉수대(烽燧臺)의운영체제와폐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양양도호부 기록에 봉화가 4곳이니, 수산(水山)이 부(府) 동쪽에 있고,【남쪽으로 임내 동산의 광정(廣汀)에, 북쪽으로 부(府) 덕산(외옹치)에 응한다.】덕산(德山)【북쪽으로 간성 죽도(竹島)에 응한다.】양야산(陽也山)이 동산현 남쪽에 있으며,【남쪽으로 연곡 주을문에, 북쪽으로 광정에 응한다.】 광정(廣汀)이 동산현 북쪽에 있다.【남쪽으로 양야산에, 북쪽으로 덕산에 응한다.】이로보아 당시는 동산현이 존재하였다.
봉수의 신호방식은 평상시(平常時)는 1홰를,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면 2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홰, 우리 병선과 접전 시에는 4홰, 왜적이 상륙할 때는 5홰를 올렸다. 만약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안개, 구름, 비, 바람 등으로 봉수에 의해 전달이 불가능한 경우 봉수대는 포성(砲聲, 信砲, 發火등)과 각성(角聲, 角吹)으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 군인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하였다.
봉수는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에서는 관찰사 또는 수령 등 모든 군사 책임자가 관장했다. 수령은 봉화군이나 오장의 근무 실태를 감독하여 이와 연대 책임을 지는 한편, 봉수대 시설의 이상 유무를 살펴 필요시 수리하는 책임도 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봉수 운용 실태는 수령의 공과(功過)에 직접 관련이 있었다.
봉수 무용론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한 달이 넘도록 알리지 않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끊어졌다. 이와 같이 국가 안위에 미치는 영향이 크자 급기야 선조 38년(1605)에는 파발제(擺撥制)를 실시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고종 32년(1895)에 봉수제를 완전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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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진산(하조대) 봉수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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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남면 남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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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0년대 해동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