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2월 : 오색석사(五色石寺)는 통일신라 때 무염선사가 12세에 출가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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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06회 작성일 2019-01-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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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석사에대한오해(誤解)와진실(眞實)을살펴보다.


세간(世間)에 오색석사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산조(開山祖)인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오색석사 후원(後園)에 한 그루 나무에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었으므로 절 이름을 오색사라 하고, 이곳의 지명을 오색리라 하였으며 절 어귀에 있는 약수도 오색약수라 하였다고 한다.
『현산지』에는 오색천 상류에 현곡사(玄谷寺)가 있었는데 현재는 폐사되었다. 이곳에 탑(塔)이 현존하여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추정 된다. 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관장 정영호)는 누군가 이곳을 성국사(城國寺)라고 불렀다 하나 사찰규모로는 미흡한 점이 많다고 했으며, 이 절을 찾아가 고증(考證)을 한 뒤「오색석사(五色石寺)」로 사명(寺名)을 쓰도록 하였다고 양양군지(2010),불교 편에 밝혔다.
통일신라시대 학자인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 12세(868)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의 나이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함] 선생이 지은『고운집(孤雲集)』에 의하면 설악산(雪嶽山)의 “오색석사는 오색돌이 있는 고로 이름 한 것이다.(五石寺有五色石故名也)”라 하였다.
오색석사는 창건 이후 신라시대의 선찰(禪刹)로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산조(開山祖)인 무염선사(無染禪師)가 선덕왕 5년(784)인 12세에 이절에서 출가하였다고『고운집(孤雲集)』과『조당집(祖堂集)』에 각각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삼층석탑(보물제497호)을 비롯하여 석사자(石獅子)와 대석(臺石)·기단석·탑재(塔材) 등이 산재되어 있고, 최근에 지은 인법당(因法堂) 1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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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색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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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층석탑




이곳에서출가하신무염선사(無染禪師)는어떤분인가?


무염선사는 신라 애장왕 2년(801)에 출생하여 진성여왕 2년(888)에 입적한 당시 제일의 고승이었다. 성은 김씨,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라고도 한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8대조이며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뛰어나 해동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때에 이곳 법성선사(法性禪師)는 당나라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무염에게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주고 당나라 유학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그 후 무염은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려 했으나 도중 풍랑으로 배가 흑산도에 기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헌덕왕 13년(821)에 다시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때 당에서는 이미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무염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서 선법을 문의하였다.
무염을 맞이하여 선법을 논한 뒤“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의 젊은이는 본적이 없다. 훗날 중국이 선풍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禪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무염은 마곡산의 보철(麻谷山寶徹)을 찾아가서 인가를 받아 법맥을 이어받고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이렇듯 10여 년간 보살행을 실천하니 그의 이름은 당나라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무염을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였는데 이때에 왕자가 성주사에 머무르기를 간청하였다. 이후 무염은 성주사에 주석하면서 이 절을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근본도량으로 삼아 40여 년간 교화하였다. 이 같이 최고의 고승인 무염이 출가한 역사적인 사찰이 양양의 오색석사(五色石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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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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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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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 돌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