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1월 : 설악은 양양의 진산(鎭山)으로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로 봉행.

페이지 정보

조회 1,064회 작성일 2019-01-16 18:10

본문

설악산의유래를문헌을중심으로살펴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주(註)기록을 보면 설악산(雪嶽山)은 익령현(翼領縣,양양군)을 지키고 보호하는 진산(鎭山)이라 하였다. 제사(祭祀)는 천하명산대천(天下名山大川)에 대·중·소제(大中小祭)를 지냈는데 설악을 영산(靈山)으로 여겨 소사(小祀)로 지내는 지역이라고 했고, 1872년 지방지도(양양도호부에서 그린 지도)에 설악산이라 표기 되어있다. 2013년 3월 18일 강원도에 지번변경승인을 거쳐 대청봉을 서면 오색리 산 1번지로 확정했다.


「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편에“명산(名山)은 설악(雪嶽)이다. 부(府)서쪽에 있는데, 신라 때 소사(小祀)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 허목(許穆)은 한계산(寒溪山) 동쪽이 설악산 이라했다.
설악이란 이름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仲秋始雪至夏而消故名(중추시설지하이소고명)중추가 되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여름에 이르러 녹는다.”하여 설악이라 이름 하였다. 조선 말 여류시인 김금원(金錦園)은「호동서낙기(湖東西洛記)」에“石白如雪故名雪岳(석백여설고명설악) 암석이 눈같이 희다 하여 옛적부터 설악이다.”라 했다.


1 (53).jpg


1 (54).jpg



조선 정조 때 실학자 성해응(成海應)이 편찬한「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에 설악산에 관한 기록 가운데“설악산은 눈같이 교결(皎潔)하여 설악산이라 칭한다.”라 했고,「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청봉은 멀리서 보면 아득하게 청색(靑色)으로 보인다하여 이름 했다고 한다.


추강 남효온의「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서두에 소솔령(所率嶺, 오색령)에 올라 여기를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 구나”라 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의『노산문선(鷺山文選)』의「설악행각(雪嶽行脚)」편에서, 상청봉(上靑峰;대청봉)정상에 돌담을 두르고 기와를 덮은 조그마한 제단이 있고, 단상의 위패에는 雪岳上峰國司大王佛神之位(설악상봉국사대왕불신지위)라 썼다.
왼쪽에 작은 글로 八道山神中道神靈(팔도산신중도신령) 오른쪽에 雪岳山神靈(설악산신령)이라 써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사리지고 흔적도 없다.


1 (55).jpg



조선시대설악산관련대표적인시문(詩文)들



매월당 김시습의 시집(梅月堂詩集卷之四)의 [기산명(紀山名)]이란 시(詩)에 금강산, 오대산, 설악산, 백두산, 지리산을 비교하는 시를 남겼는데 매월당이“설악엔 옥비녀가 펼쳐 있구나.”라고 읊은 것은 명산 중에 설악산이 가장 아름답다는 뜻이다.


紀山名(기산명)

雨洗瘦皆骨(우세수개골) 비가 씻어내니 파리한 개골(皆骨)이요.
煙收露五臺(연수로오대) 안개가 걷히니 오대(五臺)가 드러나네.
香峯桂子落(향봉계자락) 향봉(香峯)엔 개수나무 씨가 떨어지고
雪嶽玉簪開(설악옥잠개) 설악(雪嶽)엔 옥비녀가 펼쳐 있구나.
長白遙兼聳(장백요겸용) 장백(長白)은 멀리 솟아 있고
頭流壯且魁(두류장차괴) 두류(頭流)는 씩씩하고 우렁차구나.
名山窮眼界(명산궁안계) 명산(名山)에 시야가 다하였으니
不必往蓬萊(불필왕봉래) 봉래(蓬萊)까지 갈 필요 없구나.


조선시대 설악유산기(雪嶽遊山記)를 쓴 양양부사는 이해조(1709, 비선대), 유경시(1728, 유금강산록), 문익성(1757, 유한계록), 정범조(1779, 설악기), 김몽화(1787, 유설악록) 등 모두 5분이다. 특히 김몽화(金夢華) 양양군수는 관동방백(도지사) 김재찬(金載瓚)과 인제군수 오원모(吳遠謨)와 함께 정미년(1787) 9월 3일 설악산을 유람하고 적은 기행문인「유설악록(遊雪嶽錄)」의 말미에“雪嶽主人記(설악주인기)”라고 기록함으로써 설악산의 주인은 양양군(襄陽郡)임을 당당히 밝힌 것을 높이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