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양양 3.1만세운동 유적지 / 향토사연구소장 이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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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48회 작성일 2019-01-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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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이철수 소장




기사문리 만세고개


1919년 4월 9일 3.1만세운동 당시 많은 사상자를 낸 곳이다.
상광정리 감리교회 오세옥이 주동이 되어, 이응렬, 오익환, 김재한, 박원병, 오정현, 김종대, 그리고 현북면 각 마을 구장들이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각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한사람 이상씩 동원되어 4월 9일 양양장으로 갈 계획으로 상광정리 현북면사무소 앞에 모였는데, 일본측 기록 약 600백 명(실제 1천여 명)이 모였다.
군중들은 면사무소 주변에서 기세 높게 만세를 불렀고, 그 여세를 몰아 양양으로 가려고 하자 지역에 신망이 높던 김익제가 양양에는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어 인명피해가 많을 것을 예상하여 만류하자, 그 계획을 바꾸어 약 1km 떨어진 기사문리 경찰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또한 하광정리에 모인 만세군중 이외 장꾼과 구경하러 나온 아이들도 모두 만세군중에 합류하여, 군중 일부는 길가의 가로수 지주목을 빼어들고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넘어갔다.
조선독립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경찰주재소 옆 개울 언덕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경찰과 수비대가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하광정리 전원거, 중광정리 임병익, 명지리 홍필삼, 김석희, 어성전리 고대선, 황응상, 말곡리 문종상, 도천면 속초리 진원팔, 이학봉이 그 자리에서 피살되었고, 또한 19명은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았으며 태형을 받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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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리만세유적지 3.1절 기념식 >



물치장 터


1919년 4월 5일 강현면민과 도천면민이 3·1만세운동을 벌인곳이다.
이석범 선생은 3월 1일 한성의 고종 인산에 참례하고 3월 하순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중도문리(현 속초시)로 돌아와 동생 이국범, 아들 이능렬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4월 3일 도천면은 중도문리의 김영경을 추축으로, 이종황의 집에서 친목계를 가장하여 모였는데, 강현면은 장세환을 주축으로 물치리는 김두영, 박제범, 김대선, 대포리는 박사집(朴士集), 부월리는 이종순(李鍾淳), 강선리는 전달원, 윤순범, 이종엽, 하복리는 이철우, 이형우, 중복리는 김창렬, 심한준, 간곡리는 추병원, 장산리는 양익환, 회룡리는 박봉래, 침교리는 김원식, 김진선, 적은리는 김철기, 김환기, 주청리는 김경도 등이 각자의 마을을 맡아서 추진하기로 하였다.
4월 4일 밤 이능렬은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국(李鍾國)의 집에서 태극기 2폭을 만들며, 내일 5일 강현면 물치리 장터에서 조선독립만세에 참가하기로 계획하고, 다음날 5일 정오경 물치장 터에서 도천면, 강현면의 군중 수백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인은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약 4km 거리인 도천면 대포 경찰주재소로 가서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니, 일본경찰들은 가족들을 모두 배에 태워 바다에 피신시키고, 우리는 갈 태니 제발 조용히 만세를 부르고 돌아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 후 군중들은 내일 양양경찰서에 가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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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치 만세운동 기념식(양양문화원)>



양양읍 임천리(林泉里)


설초 이석범(雪樵·李錫範)선생은 조선 인종 원년(1545년)에 양양 인으로 처음 양양부사를 지낸 이춘령의 10대 손으로, 1859년 양양면 임천리 14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 초시에 합격하여 1899년에는 중추원의관으로 국정 심의에 참여하였으나, 그 후 일제의 잔악무도한 한일병합통치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1906년 양양군수 남궁 억과 함께 양양현산학교와 도천면(현 속초시) 도문리에 쌍천서숙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항일 애국정신 함양에 노력하였다.
1919년 초에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3월 1일 유림 10여명과 함께 한성의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 후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와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지역유림과 양양보통학교의 신문화 세력, 양양감리교인, 농민 등을 설득하여, 4월 4일 양양장날을 기하여 3·1만세운동을 모의 계획한 마을이다.
이 마을 이교완(李敎完), 이교정(李敎貞), 이건충(李建忠), 이현철(李鉉喆), 김충진(金衝鎭) 등 몇 집에서 최인식(崔寅植), 최항식(崔亢植) 등 수십 명이 모여 수일간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 던 중 4월 3일 군수 이동혁과 군속 심운택에게 탐지되어, 이석범을 비롯한 마을주민 22명이 체포되고 인쇄기 및 태극기 374매가 압수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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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범 선생 생가 터>



양양감리교회


양양감리교회는 1901년 하디 선교사가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설립한 교회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5대 김영학 목사, 8대 송정근 목사, 조화벽 성도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
김영학 목사는 당시 양양지역의 모든 교회를 찾아가 설교하며 항일사상을 심어주었으며, 만세운동 때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다가 일경에게 잡혀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 후에도‘대한독립애국단’에서 활약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에 정부에서는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조화벽(趙和璧)은 전도사 조영순의 외동딸로서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유학 중에 개성 만세운동 결사대원으로 참여하였는데,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3월 중순 독립선언서을 버선목에 몰래 감추어 대포항으로 귀향, 양양교회 청년 김필선(金弼善)에게 전달하여 지역유림, 양양보통학교 동문, 농민들과 규합하여 4월 4일 양양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후 1925년에는 유우석((柳禹錫·유관순의 오빠)과 결혼하였고, 1932년에는 가난하여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한 농촌의 학생을 위하여 양양교회에 정명학원을 개원하여 13년 동안 6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3·1운동 후 유우석의 가족들은 양양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으며, 고모인 유정숙은 양양면 사천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에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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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벽 지사>



양양장 터


1919년 4월 4일 양양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3·1만세운동은 이석범(李錫範)과 조화벽(趙和壁)이 몰래 가져온 독립선언서가 단초가 되어, 지역유림과 신문화 세력, 종교인, 서민이 연합하여 양양면 남문리 35, 57번지 일원의 장마당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은밀히 추진되었다. 뜻하지 않게 전날인 4월 3일 임천리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던 중 일부가 발각되어, 이석범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이 체포되고 태극기가 압수되었다. 그러나 4월 4일 장날에는 수천 군중이 장꾼을 가장하여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또한 장보러 나온 사람들과 합세하여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울분에 찬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만세군중은 하루 종일 이어졌고, 낮에는 겁이나 숨어있던 일본경찰이 날이 어두워지자 총을 쏘기 시작하여 더욱 격렬해 졌다.
이와같이 양양 3·1만세운동은 4월 4일부터 9일까지 6일간 6개면 82개 동리의 남녀노소 거의 전군민이 참가하여, 12명의 사망자와 43명의 부상자, 체포 142명 중 실형 73명, 태형은 수없이 많았을 만큼 전국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극열하게 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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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양양 장날 모습>



양양경찰서 터


1919년 4월 4일 양양장에 모였던 만세군중은 오후가 되자 경찰서(당시 군내면 문안리)에 수천 여명이 몰려가 전날 양양면 임천리에서 체포한 이석범(李錫範)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격분한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咸鴻基·당시 22세)는 경찰서장실로 뛰어 들어가 고교문차랑(高橋文次郞) 서장에게 화로(火爐)를 집어 던지려 할 때 옆에 있던 사법주임이 칼로 팔을 치고 허리를 찔려 죽였다.
이에 뒤따라 들어가 또다시 항의하던 손양면 간리의 권병연(權炳淵·당시 22세)도 일본도에 목을 맞아 쓰러지자, 이에 군중들이 격분한 가운데 서면 상평리의 김학구(金鶴九)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찰서로 뛰어 들어 가다가 일경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때에 총에 맞은 부상자는 가평리의 신영묵(辛永默), 북평리의 용조원과 용천리의 노병우(盧炳禹·구장), 박의병(朴毅秉), 한원일(韓元一), 남순극(南淳極), 박경화(朴敬和), 최명옥(崔明玉), 김경숙(金敬淑), 이두하(李斗夏), 노병택(盧炳澤), 남성극(南成極)과 이흥달(李興達)은 턱뼈가 부러지는 등 3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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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세운동 모습>



성내리 곳집 터


1919년 4월 4일 양양장날 만세운동에 배포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각 면별로 극비리에 구장집이나 서당에서 제작하기로 했다.
서면은 상평리의 박춘실(朴春實)이 임천리에서 만든 종이 태극기를 이교학에게 받아 집에서 수기로 만들었고, 현북면은 상광정리 김종대 집에서, 하광정리는 구장인 김진혁의 집에서, 강현면도 각 마을 책임자인 구장 집과 서당 훈도였던 적은리의 김철기(金鐵起) 집에서, 도천면은 중도문리 이종황의 집에서, 물치리는 김두영(金斗榮), 박제범(朴劑範), 김대선(金大先) 등이 태극기를 만들며 계획에 참가하였고, 손양면에서는 가평리와 왕도리에서는 제작하였으나, 주리와 우암리 주민은 만들 시간이 없어 태극기 대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깃발을 들고 농악을 울리며 만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양양면은 조화벽이 독립선언서를 양양감리교인이며 면사무소 급사였던 김필선에게 전하여, 동료들과 면사무소의 등사기로 종이와 옥양목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는데, 이때 조화벽도 86매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임천리에서는 이석범 주도하에 이교완(李敎完), 이교정(李敎貞), 이건충(李建忠)등 몇 집에서 만들다 장날을 하루 앞둔 4월 3일 일부가 발각되어, 이석범을 비롯한 마을주민이 체포되고 제작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압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급기야 피신하여 감곡리 이상온(李相瑥) 집과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성내리 47번지 뒷산에 있는 곳집(喪具保管所)과 거마리 김종태 집, 그리고 김종옥 집 뒷산 곳집에서 밤새 11,000여개의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의 사정이 얼마나 급박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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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내리 곳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