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역사와 문화

[양양의 역사] 일제강점기 (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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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41회 작성일 2019-01-2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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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 조선총독부 관보에 오색령 도로를 3등 도로로 고시함.


◈ 1914년 군과 면의 폐합에 따라 부내면·위산면·부남면을 통합하여 군내면으로, 동면·남면을 손양면으로, 강선면·사현면을 강현면으로 도문면·소천면을 도천면으로 서면·현북면·현남면은 그대로 두어 7개 면을 관할하였음.


◈ 1915년‘한국근대지도’제작시 최초로 한계령 지명 표기 함.


◈ 1916년 인제군 내면 광원리 일부가 서면 명개리(조개리)로 편입됨.


◈ 1919년 양양의 3·1만세운동은 이석범과 조화벽이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어온 것이 도화선이 되어 4월 3일~4월 9일까지 7일간 7개 면 132개 마을 15,000여 명이 참여 치열하게 전개된 곳으로, 사망은 함홍기 열사 외 11명, 부상 43명, 체포 142명 실형은 3년 이내 73명이고, 태형은 수백 명이나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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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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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벽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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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만세운동 기념비



◈ 1923년 오색령 도로를 2등 도로로 만들어 달라고 영서의 4개군(춘천·홍천·양구·인제)은 강원도청에 진정서를 육속(陸續)제출하였고, 영동의 강릉·삼척·울진군에서도 역장동성(亦將同聲) 협찬하였다고 매일신보에 보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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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양양군민의 교섭으로 4월 18일 조침령도를 기공 함.


◈ 1931년 양양·인제에 호소식이 전해지자, 양양군수 박재수는 인제군수 김극일과 인제군청에서 오색령도로에 관한 원만한 협의를 마치고 오색령을 통해 귀청하였다고 매일신보에 보도 됨.


◈ 1936년 병자년 포락 때 사망한 고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창선(元昌善, 당시 양양군 행정계장)이 글을 쓰고 비를 세웠다고 함.


◈ 위도비(慰悼碑)에는 양양에서 사망 584명, 부상 500명, 가옥유실, 가옥침수, 농경지 침수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고 있음.


◈ 1937년 도천면 속초리가 속초면으로 개칭, 1942년에는 속초읍으로 승격, 1963년 속초시로 승격 양양에서 분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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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산공원 위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