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편 집 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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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40회 작성일 2019-10-0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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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집 후 기


양양 3‧1만세 운동이 일어 난지 어언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당시 양양인들은 일본 군경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대한독립을 위해서 일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에 참여 하였다.
당시 양양군7개면 중6개면 82개 마을에서 유림,기독교인,불교인,천도교인,농어민,어린학생에이르기 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연인원1만 5천여 명이 참가하여 6일간 치열하게 일어났다.이는 현재 양양에서 살아가는 양양인 들의 애국충정(愛國忠情)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큰 사건이었다.


3‧1만세 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양양 3‧1만세 운동사를 편찬하면서 당시 양양인의 함성을 생각하며 그 분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생생하게 담아내려고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심혈을 기우렸다.


기존의 3‧1만세 운동 자료와 발표된 논문과 유공자들의 유품과 유적지를 어렵게 찾아내어 사진들을 책자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양양 3‧1만세 운동 당시 만세군중의 선두에서 또한 마을의 지도자로 활동한 분들 중 61명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지만(2018년 10월 23일 까지), 지금까지 안타깝게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분들이 70여 명이 넘게 있음을 확인하였다.


3‧1만세 운동 후 8‧15해방 될 때까지26년간을일제의감시 속에 사는 동안 공훈을 세우고도 일제의 감시와 형벌이 두려워 고문과 태형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말 못하고 숨어 살아야 했다. 양양 3‧1만세 운동 후 100년이 흘러 자료들은 손실되었고 그 당시의 증언을 듣기가 쉽지 않았다.
또 기사문리 만세고개에서의9명이 순국하였는데4명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양양 충렬사에 모셔진 만세고개 희생자 중 문종희가 그의 동생 문종상으로 잘못 모셔져 있어 문종희로 바로 밝혀 놓았다.


우리 연구원의 소망은 책의 출간을 통해, 양양의 정체성과 만세운동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저명한 학자들의 양양만세운동에관한 연구와 세미나 개최등을 바탕으로 양양만세운동 기념관 건립을 기대해 본다.


끝으로 양양 3‧1만세 운동사 편찬에 증언을 해주신 유공자 후손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2019년 7월 31일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 연구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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