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③ 조화벽(趙和璧: 1895.10.17~197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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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42회 작성일 2019-10-2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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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벽은 양양감리교회 전도사 조영순(趙英淳)과 어머니 전미흠(全美欽)사이에무남독녀로 양양면 남문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성경공부를 하였고, 1910년 16세에 새로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남감리교 미션스쿨인 원산성경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2년에는 원산 루씨여학교(樓氏女學校)로 진학하였는데 당대 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운 이화, 배화, 숭의, 호수돈여학교 등과 함께 기독교 계통의5대 명문사립 여학교였다. 그 후 개성 호수돈여학교 보통과와 고등과에서 수학하였다.


조화벽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이 개성으로 확산 될 즈음, 호수돈여학교 졸업을 앞둔3학년 학생으로 비밀결사대원으로 어윤희, 권애라 등과 함께 3월 3일 개성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호수돈여학교 학생 대표들이 거리로 나가 만세운동을 펼치자 뒤이어 미리흠여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가세하여 개성의 만세운동은 빠르게 번져나갔고, 마침내 각 학교들은3월5일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던 조화벽은 일경의 삼엄한 경계를 피하여 몰래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경원선 열차로 원산을 거쳐 배편으로 고향인 양양 대포항에 도착했다. 이때 일경의 검문을 받았지만 가방 안의 버선목에 숨겨놓은 독립선언서는 발각되지 않았다. 조화벽의 맏며느리인 김정애(金貞愛: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장)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대포항에 도착하자 일본 경찰이 소지품을 전부 압수하고, 관사로 끌고 가 신문을 하였는데 가방의 버선목 속에 감춘 독립선언서가 발각될까 봐 굉장히 마음을 졸였다”고 했다.


무사히 고향에도 착한 조화벽은 당시 양양감리교회에 서 시무하고 있던 김영학 목사와 만났고, 청년지도자인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인계하고,당시 유림의 지도자인이석범 선생과 연결되어 1919년 4월 4일 양양장날을 기하여 3‧1만세운동을 계획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양양 만세운동은4월4일부터9일까지 매일 매일 “6개면 82개 동리에 서 연인원 1만5천여 명이 참가하였다”라고 1923년에 발행된 「개벽지42호」 에 록기하고 있다.
그 후 조화벽은 다시 개성으로 돌아가 호수돈여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그 해 가을 충남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 무렵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현장에서 유관순(柳寬順)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일경의 총탄에현장 에서 살해되었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또한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柳愚錫)도 같은 날 충남 공주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공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당시 조화벽은 황인식 교감 집에하 숙을 하였는데, 하루아침에고아가 된 유관순의 두 동생 인석(仁錫,13세)과 관석(冠錫,8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오갈 때 없는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또한 유우석의 옥바라지에정성 을 기우렸으며 영명학교 교사였던 임영신(任永信)과 함께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軍資金)을 십일조(十一條)를 통하여 보내기도 했다.


1923년 유우석과 혼인하였고, 1925년 개성 호수돈여학교 교사를 거쳐1927년에는 원산 진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원산 여성기독청년회(YWCA) 부회장과 해원상구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남편 유우석은 원산 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지만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32년 남편 유우석이 잠시 해외로 망명하자, 조화벽은 고향 양양으로 돌아와 1926년도에 기 설립한 정명야학원을 주간부 정명학원(貞明學院)으로 변경하여, 1935년 4월 8일 주간부 신입생70명으로개원해1938년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정명학원은 가난하여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한 피폐한 농촌의 학생을 모아 문맹을 퇴치하는 민족교육을 실천하였으며, 1944년 폐교될 때까지13년동안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인재양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7년 11월에는 양양부인상회 발기인 모임에이사로 참여하는 등 여성으로써 사회활동을 지속했다.이때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된 어머니를12년간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삼형제를 길렀으며, 유우석 고모인 유정숙은 강현면 사천리에서 거주하였고, 두 동생들도 양양에서 결혼시켰다.그 후손들이 아직도 양양에 서 살고 있다. 드디어 1945년해방이되자 양양은 38도선 이북으로 갈라져 공산치하에들어가자 월남하여, 서울 성북구 정릉에살면 서 미아중앙교회에 서 여 선교회 회장으로 봉사하며 79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신앙심으로 살았다.
이에정부에 서는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시아버지 류중권,시어머니 이소제,시작은아버지 류중무, 시누이 류관순, 남편 유우석, 시조카 류예도, 5촌 시조카 류제경, 외조카 한필동, 가족 모두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이에조 화벽은 춘천의 윤희순 의병장,철원의 곽진근 지사와 함께 강원도3대 여성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또한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에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 우당 이회영의 안사람 이은숙(李恩淑)여사와 27년간이나 임시정부에서 안주인 역할을 한 정정화(鄭靖和)선생과 함께 유관순 집안의 며느리로서 독립운동에일생 을 바친 조화벽은 항일독립운동사에양양이 낳은 근대 선각여성이다.


-다음은 유관순 열사의 고모인 유정숙 여사의 거주지를 조사한 내용을 싣는다.


<유정숙(조화벽 지사의 시고모) 거주지 조사 내용 >


조화벽 지사의 시고모(媤姑母)인 유정숙이 양양읍 월리에서 거주하였다는 예기를 듣고 월리 거주 김택종씨를 찾아가 현지 조사에임함.
○일 시: 2018.10.24. 13:00~17:00
○ 장 소:양양읍 월리,양양읍 사천리
○ 조사자: 김양식, 김광영 연구원
○ 피 조사자
-김택종:76세, 월리 거주 주민
-김택기:72세, 유정숙 거주지 주택 소유자(전 월리 주민)
-박상형:64세, 전 양양군의회 의장,현 사천리장


▶ 김택종 : 어려서부터 유관순 열사와 그 가족들이 살았다고 하는 집이 현 자신의 집 앞(남쪽)함석집이며,옛날부터 예수집으로 불려 왔다고 함.


▶ 김택기(유정숙 거주 주택 소유자)
-당72세, 전화:033-672-0245
-지번:양양읍 월리142번지(안산 2길 62) 158평
-김택기가 초등학교 다닐 때 유정숙 부부가 살던 초가집을 허물고 아버지(김원호)
가 지금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 중학교1학년 때 준공 하였다고 함.
-아버지는 일정 때 전 양양읍장을 지내신 최성호씨와 철도국에 근무하셨으며,유
정숙 부부가 지금 우리집터에 서 살았다고 하며 일본경찰의 후환이 두려워 자세
한 이야기를 꺼리셨으며 집 번지도 우리 집과 거리가 먼 월리 150번지라고 각종 기록에기록하 셨다고 합니다. 유정숙의 남편은 대학 교수인지 고위층이었던 걸로
들었습니다.


▶ 박상형
- 현재 속초에살고 있는 유정숙이라고 알고 있는 분은 유정숙이 아니고 유정숙의 딸 최순영(32년생)이며 아들 기진(당65세가량)이 속초에 거주 한다고 하며, 유정숙의 남편은 경찰이었는데 사별을 하고 사천으로 재혼을 하여 아들 기진을 두었으며 본인은 요양병원에 입원 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것으로 알고 있음.
- 최순영의 동생의 아들 최선조(당 60세 가량)는 현재 암 투병 중으로 10.25 퇴원한다고 하며 최기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