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② 함홍기(咸鴻基: 1895.3~19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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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42회 작성일 2019-10-2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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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홍기 열사는 손양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양양군의 기미3‧1만세 운동사는 물론 전국에서도 유래를 찾기 함들 정도의 의로운 죽음으로 일제의 폭압에 온몸으로 항거한 열사이다.
1919년 24세의 나이에손양 면 가평리 구장으로 4월 4일 만세운동 당시 경찰서장실로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전날 임천리에서 태극기를 만들다 잡혀온22명의석방요구에 거절당하자 경찰서장을 꾸짖으며 화로를 집어 던지려 거세게 항의하다 일본 순사의 칼에 양팔이 잘리고 목에 칼을 맞아 현장에서 장열하게 순국하신 대한민국 기미 3‧1독립만세운동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함홍기 열사는 전 구장 신세묵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양양현산학교와 양양보통학교 출신으로 양양의 만세운동 주동자들과 자주 연락을 취하고 이를 손양면 전체에연 락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한편 친척 관계였던 현북면 상광정리 오세옥에게도 연락을 취하여 현북면 주민들과도 긴밀히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1919년4월 1일 양양군 각 면 책임자들이 임천리 이교완의 집에 모여4월4일 양양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4월 3일 모의 사실이 양양군수에게 발각되어 만세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주모자급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실행에들어 갔다.장날 이었던1919년 4월 4일 만세운동 낌새를 사전에 알아차린 일경은 장터를 폐쇄하였다. 하지만 함홍기열사는 아침부터 손양면 사람들을 추동(推動)한주민들과 양양장터로 향하는 행군대열을 선도하여 남대천 다리에 이르니 그곳에 는 이미 일경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일경에대치하 다가 동운교를 건널 수 없게 되자 동운교 위아래로 분산되어 물을 건너 양양장터에들어 가 각 면에서 모인 수많은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군중을 인솔하여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 마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그리고 주도자 몇 명이 경찰서로 들어가 또 경찰서장에게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함홍기는 경찰서장실에 뛰어 들어가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 경찰서장실 안에불이 타고 있는 화로를 들면서 사타쿠 경찰서장에게 덤벼들었다. 이때 옆에있던 사법주임 아끼야마와 오오이시 두 명의 경찰이 달려들어 일본도로 내리처 그의 양 팔이 잘려져 팔을 잃고 피를 흘리며 넘어진 그는 계속 굴하지 않고 경찰서장을 꾸짖다가 끝내 왜경의 칼에 목을 찔리며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조선인의 기개를 떨쳐 보여준 의로운 죽음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 24세의 청년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권병연도 격한 감정을 못 이기고 경찰서로 뛰어 들어가 일본경찰의 칼에 목을 맞아 순국하였고, 이에 군중들이 격분한 가운데 상평리 구장 김학구 역시 경찰서로 뛰어들어 일경의 총에 난사당하여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함홍기 , 권병연, 김학구 열사의 죽음은 만세운동을 벌이던 군중을 자극하여 끝내 격렬한 무력시위로 발전하게 했다. 일본경찰은 경찰서 복도에가마 니로 덮어 놓았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열흘이 지난 후에나 가족에 게 인도 되었다. 일본경찰은 함홍기열사의 장례 때에도 동내 주민이 하관하여 시신을 묻으려고 할 때 관을 꺼내어 깨어버리며 행패를 부렸다고 전하는데, 이유는 장례식 때 동네 전 주민들이 모여서 울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후 가족들이 조용히 다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1963년 손양면 출신의 만세운동 열사 함홍기, 권병연을 추모하는 비가 손양면 간리 언덕에 세워졌다.
또한, 2019년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손양면 주최로 2019년3월 1일 손양면사무소에 서 기념식과 함께 함홍기열사의 추모비를 손양면사무소 앞마당에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양양 3‧1만세 운동 추모비


3‧1만세운동 추모비 대한 이종우(李鍾㝢: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 고문) 글을 소개한다.
함홍기,권병연 의사 추모비는 양양 현산공원에1963년3월 1일 건립 되었으나 1980년대에손 양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고,다시 7번국도변으로 옮겨졌다.
1919년 4월 4일 석양이 질 무렵 양양경찰서장실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일본 경찰이 휘두른 일본도의 칼날에가평 리 구장 함홍기(당시 24세)에이 어 간리에서 살면서 엿장수를 하던 권병연(당시 28세 부인은 주막을 차리고 술을 팔며 생계를 이어감)도 같은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무참히 희생되었다.
함홍기, 권병연이 희생된 지 44주기인 1963년 ‘재건국민운동 양양군지부 손양촉진회(회장 김주악(金周岳) 사무장 김시환(金時煥) 주관으로 손양면민 일동의 민의에의하 여 손양면 출신 함홍기,권병연의 애국충정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3‧1운동의사 두 분의 추모비를 제작하여 현산공원에 세웠다.’
그런데 1980년대 양양군에서 현산공원을 정리 할 때에 추모비를 철거해 버리는 것을 본 당시 손양국민학교 교장 최갑규(崔甲圭)선생이 손양국민학교 관리기사 김봉호(金奉鎬)와 같이 손수래(인력거)에 실어4㎞가넘는 손양국민학교 교정 남쪽 모퉁이의 무궁화동산 한가운데에 추모비를 옮겨 관리하면서 애국 애향의 참교육과정으로 교육을 하였다.

그 후 1991년 10월 롯데건설에서 7번국도 4차선 확포장공사를 준공하니 권병연의 고향마을인 간리 고개 지금의 8군단 앞쪽 도로변에 잔디공원을 조성한 가운데에 옮겨 세워 기리고 있으나 추모비주변으로 다니는 행인은 없고, 80㎞이상으로 질주하는 차량뿐이다.



○ 함홍기 열사 생가 철거시 유품


1917년 건축되어 2013년 철거과정에서 양양문화원이 입수하여 보관중인 상량문 내용.



[咸鴻基烈士上樑文〕


維歲次丁巳二月乙未朔初三日丁酉運主咸鴻基敢昭告于
土地之神曰述夫 向陽背陰始卜吉於山水 人傑地靈 盖 別基新主 土木始營築勉三年 之會議於是好
上棟下宇盖取衆於乾坤 父堂子構聖世逸民 瑞花滿發果叶一夜之夢徵
爰始爰謀得人力於築室 東挹鰲峰文章之魁奇不窮 文酒嘗與吾相論斐相公之綠野 山宜採水宜釣
善頌善禱穫神助於奠基 北拱蟹巖君子之育德可狀 花石每戒汝勿俱李德裕之平泉 原可農濕可業
得眞樂於漁樵 壽考富貴質遐福於百年 聊爲短引 奇哉奇哉 瞻彼雪嶽 龍勢行遙 五坮又高逶迤一龍
有餘飽於衣食 松菊花筠宜可賞於四時 表揭新樑 主此襄陽 ◯◯◯嶂 主基江陵回抱百餘里
漢江源出兩間集合諸流放于海 山川麗明挺其靈氣 阿郞偉抛樑東 太乙安期爲我說
自是天君降百神 穫野連脈鍾降眞君 一點丹峰爲筆枝 淸都不遠馭仙風 庭花院竹春無恙
呪祝不己 人口豊盛 畜足蔓遅 心欲新造 畏也此狀 今日此時蒙昧不淨之來人 伏惟俯鑑 星奇時合
福興雲會 五福咸臻 六害自蔑 問卜吉日 莫知吉凶 造新神主遝安前日所臨方 荒◯皆吉
◯願上樑由去由來 阿郞偉抛樑下  秋穫春耕合有時 左仁門右義路 言以禮行以信四德三功
地久鍾靈鍚孝澈於不匱 大海所窮皆我田 相逢盡是神農者 行人皆遂君子 聖賢莫擇小人間 皆遂於是
呪祝誠於今 時誠極於心心極誠於 神其饗之
發福我路九利 願期於神主喜來感發 謹以酒果用伸虔告謹告


<번역>
유세차정사이월을미삭초삼일정유운주함홍기감소고우
토지지신께 다음과 같이 아뢰나이다.
양을 향하고 음을 등지는 산수에서 비로소 좋은 날을 가려,
들보 올려 집을 지으니 건곤의 법도를 취하는 상이로다.
인걸은 지령으로 태어나니,여기에아 비 집을 자식이 구축하는 도다.
숭상하도다.
명당 터 새 주인은 성세의 일민으로,가옥공사를 삼년간 의론하면서 힘 써 짓고,상서로운 꽃 만발하는 하룻밤의 꿈과 같이 좋은 결과이루며, 여기에이에 계획하고 도모하여 인력으로 집을 지었으니, 송축과 기도를 잘하여 신의 도움으로 터를 정하여 얻었으니, 동쪽에 서 오봉이 읍하고 괴기한 문장은 무궁하리며,북쪽에서 게바위가 받드니 군자의 덕을 기르는 형상이며,시주(文酒)로 일찍이 우리들과 서로 논하던 비상공의 녹야에화, 석 (花石)을 모두 경계하지 않는 이덕유(李德裕)의 평천(平泉)이며,산이 마땅하여 채수하니 낚시도 의롭고,들은 농사도 가하니 그 업이 가하며,바다와 산에서 참된 즐거움을 얻고,의식이 넉넉하여 항상 배부르며,백년 오래오래 오복의 바탕에 서, 사군자 사시 볼만하며, 짧은 시 넉넉하지는 못하지마는,새 들보에 드러내도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저 설악산을 쳐다보니,양양은 주인이다,용의 기세 멀리 뻗고, ◯◯◯높은 산, 오대산의 높은 한 용이 꿈틀꿈틀 뻗어 내렸으니, 주인의 터는 강릉에서 백여리 돌아 안았구나.
양골에서 원출한 남대천은 바다로 흘러 모인다.
산천은 수려하고 그 영기 맑고, 진군이 하강하여 만종의 곡식을 거두는 들이 이어진다.어영차 들보 머리 동쪽으로 떡을 던지니,한 점 모란봉이 붓대가 되며, 태을 안기생의 위아설이 되고, 불원 청도에선풍이 불어오며, 자시로 하느님의 백신이 내리시니, 정원은 갖은 꽃 대숲이 봄 같아 근심 걱정 없다.주술을 멈추지 않으니,복이 구름처럼 일고,인구가 풍성하고,오복이 모두에이르며 , 천천히 덩굴같이 넉넉히 쌓이고, 자연히 육해를 업신여기며,새로이 지으려는 마음에,길일을 점치며, 이 형상을 두려워하고, 길흉을 알아 미리 막으며,오늘 이시에부 정한자 옴은 몽매하니, 새로 지은 신주께서 임하실 방위에전일 편안히 오셨다,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별이 기이하게 때에 합치니, 거친◯◯가 모두 길하며, ◯원하는 상량의 가고 오는 유래는, 땅은 영원하듯 영기의 복은 맑은 효성과 같이 지극하다.어영차 들보 아래 떡을 던지니, 대해의 끝까지 모두 내 전답,봄에 밭 갈고 가을에 거두어 드림 모두 때가 있고, 이는 모두 신농씨의 만남이며,좌측 인문 우측 의로운 길, 행인은 모두 군자를 따르며, 언행 예의롭고 믿음이 있으니,성현은 소인배도 가리지 않으며, 사덕과 삼공, 모두 이에 따르니,지금에정성으 로 빌며 축원하나니,나의 길에는 모든 이로움의 복이 일어, 지극정성의 마음과 마음으로, 신주에게 원함이 기쁨의 느낌으로 피어나도다. 신께서 흠향하시기를,삼가 주과를 차려 놓고서 정성을 펴 경건히 고하나이다.

飜譯又泉李鍾㝢


註.
花石/ 琪花瑤草와 奇巖怪石
平泉/唐나라名宰相李德裕의 別莊
斐相公/大學二.傳文3,止至善에 有斐君子라는 句이 있는데
“의젓하신 군자”라고 해석하였으니
의젓한 상공 즉 훌륭한 재상이라고 해석해도 좋으리라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