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② 강현면·도천면

페이지 정보

조회 1,225회 작성일 2019-11-04 17:53

본문

강현면과 도천면의 군중들이 5일 물치장터와 대포주재소에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마치고 약속대로 6일은 양양에와서 만세를 부르려고 장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베주머니에 주먹밥을 싸서 망태에집어 넣고15km이상을 걸어서 양양까지 왔다.
이 날도 이재훈, 김영경, 이국범, 장세환, 김원식, 김두영 등 강현면, 도천면 주도자들이 앞장서서 양양읍내로 진출하였다. 800여 명 정도가 되는 군중이 다시 모여 만세운동를 펼치기 위해 양양장터로 향했다. 읍내로 향하는 만세군중 대열이 양양면을 통과 할 때, 양양면 조산리, 사천리, 청곡리 등의 주민이 합세하여 군중은 점점 늘었다.
어제 대포항에 서 일본 사람들이 이미 배를 타고 피신해 있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사기는 충천했다.
어떤 이는 독립이 된 줄 알고 양양에 가서 일본사람을 쫓아내기 위하여 나갔다. 이날 만세군중들은 우리도 만세를 부르니 정말 독립이 되겠구나하는 믿음이 생겼다. 물론 마을 책임자의 격려도 있었지만 오늘은 농사일과 바다의 고기잡이를 모두 미루고 양양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일경들은 만세군중들에게 “우리는 돌아 갈 것이니 조용히 만세만 불러라”고 간청하는 말을 믿었기에독립 을 눈앞에 둔 것 같은 흥겨운 기세가 아주 높았다.
그러나 당시 양양면의 사정은 달랐다. 양양읍내 진입 통로인 동쪽 연창리 대미소에 일경과 수비대는 새끼줄로 길을 가로 질러놓고 일반인의 통과를 막고 있었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군중 특히 장세환, 김원식 등이 이끄는 강현면 군중들이 조산리를 지나 연창리 대미소 부근 수비대 앞에 당도했다. 당국에서 증원된 일본헌병들에의하 여연창리에서 저지당하게 되었다.이 때,주동자 장세환은 선두에 섰던6명의 시위대와 함께 무자비한 구타와 폭력을 당하고 해산되는 뜻 하였으나, 물러나 군경과 대치하다가 손양면민이 동운교에 모여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수비대 군경의 포진(鋪陳)에도 불구하고 군중900여명은새끼줄을 끊어버리고“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일시에집결지인 양양장터로 들어갔다.
이때 주리 장두용은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 당시 김종극 선생의 수기


6일 강현면 만세 상황을 당시 14세였던 김종극(전 양양군초대문화원장)이 강현면 중복리에서 동네 어른들을 따라서 물치장터에 운집한 만세운동 군중들과 함께 물치리부터 양양 연창리까지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하였던 상황과, 만세운동 후 주동자(김창열)가 연행되기까지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일기 형식으로 기술한 풍상구십평생행적소회록(風霜九十平生行績所懷錄)의 내용을 소개한다.


『1919년4월6일己未年(기미년)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大中(대중)을 따라갔다. 동리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러 간다기에 無酌定(무작정)으로 따라갔다. 물치리에서 태극기를 얻어 들고 萬歲陳列(만세진열)에 들어가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며 따라갔다.四列宗代(사렬종대)로 列(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津軍(진군)하였다.
선두에는 큰 깃발을 나부끼고 만세를 연창하면서 連昌里(연창리)대미 沼(소)밑에 다다르니 憲兵五名(헌병5명)이 銃(총)에 칼을 꽂고守備(수비)하며 길 中間(중간)에 出入禁止線(출입금지선)인 沮止線(정지선) 거어 놓고 萬若(만약)이線(선)을넘어오면 發布(발포)한다고 겁을 주며 暴力(폭력)을 가하자 군중들이 解散(해산)되고 말았다.

萬歲後(만세 후)檢擧逮捕(검거체포)하기 始作(시작)하였다.
우리洞里(동리)에도巡査(순사)2名과守備隊(수비대)1名이와서金昌㤠(김창렬)氏를 逮捕連行(체포연행)하는 것을 보고 驚愕(경악)하였다. 그때 그 동생이 質問(질문)하니 장작 개피를 들어 毆打(구타)한다.나는 恐怖(공포)끝에 집으로逃亡(도망)하였다.日本植民地政策(일본식민지정책)이 苛酷(가혹) 함을 맛보았다. 金昌㤠(김창열) 氏는 萬歲運動(만세운동)主動者(주동자)로 逮捕(체포)되어 二年間(2년간)咸興監獄(함흥감옥) 살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