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①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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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39회 작성일 2019-11-0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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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면은 장세환, 김두영, 김원식을 책임자로 정하고 각 마을 구장과 함께 해 나갔다. 또한 물치감리교회는 교회대로 별도로 물치장터에만세 군중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또한 회룡리 구장 박봉래,물치리 구장 김두영과 박제범,김대선, 강선리 구장 전달원과 윤순범, 이종엽, 중복리 구장 김창렬과 심한준, 하복리 구장 이철우 및 이형우, 간곡리 구장 추병원은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손으로 복사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장산리 양익환 ,침교리 김원식과 김진선,사교리 구장 김철기와 김환기, 주청리 구장 김경도, 적은리 장세환은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복사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마을 구장은 자기 마을에 서 한집에 서 한 사람 이상 주민을 동원하였다.
이 날은 물치 장날 이었다. 당시 대포항은 교통의 중심으로 대포의 이웃 마을인 물치리는 자연히 상업의 중심지로 물치 장날은 번성했다.
1914년 일제는 통치수단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당시 강선면과 사현면을 강현면으로 통합했고 면사무소는 장산리에 두었다. 과거 사현면의 주민들은 물치장터로 오다가 당시 강현면사무소에 서“대한 독립 만세”를 땅이 꺼져라 외쳤다. 그러자 겁에 질린 면장 및 면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도망가고 서기 김남훈(金南薰)만 남아 있다가 만세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면사무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군중을 구장이 선두 지휘하여 물치장터로 행진했다.


강선리 김두영과 전달원은 감리교인으로 교회의 조직망을 펴서 아침 일찍부터 감리교인 약 60여 명을 데리고 물치장터에 모여 있었다. 또 강현면의 북부 지역 마을 주민은 물치장터로 모여 들었다.


이렇게 약속된 물서치장터에강 현면에서 집결한 500여 명의 만세군중은 저 마다 소형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독립선언식 장소인 물치장터 쌀가게 앞에 모였다.
옥양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는 각 마을 군중 선두에서 펄럭였다. 또 장대에대 형태극기를 달아서 높이 세웠다.하늘과 땅과 세계만국에 알리려고 아주 높게 세웠다.
동해의 바닷바람과 설악산 바람에 태극기는 힘차게 휘날렸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소리를 군중은 침묵하며 새겨들었다.


공약삼장을 낭독 할 때는 군중도 큰 소리로 따라 했다.


낭독이 끝나자 지도자의 “대한 독립 만세” 선창에 만세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을 설악산이 울리도록 외쳤다. 삼창이 끝나고도 독립을 맞이한 것처럼 “대한 독립 만세”을 연이어 부르고 불렀다.
물치 마을 앞 동해의 거센 파도 소리가 몽돌을 굴리는 소리는 분노한 군중의 “대한독립 만세”에 화답하는 뜻 했다.


이때의 상황을 강원도장관이 보고한 전화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동군(同郡) 강현면(降峴面) 시장(市場)에 폭민(暴民) 약(約) 오백(五百)집합(集合) 점차(漸次)증가(增加)의 형세(形勢)이다. 금야(今夜)대포(大浦)또는 읍내(邑內)를 습(襲)
할 계획(計劃)있음에 엄중(嚴重)경계(警戒)중(中)”12)


물치장터의 만세운동에는 물치리의 계획을 담당하던 김두영(金斗榮)과박제범(朴劑範), 김대선(金大先)의 활동이 컸는데, 김두영은 원래 도천면 대포리 사람으로 대포주재소가 설치되면서 집을 빼앗긴 후 물치리로 이사하여 살았으니 일본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리고 김대선과 박제범은 나이 어린 감리교인 이었다.


이렇게 장세환을 대표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오후에는 그 기세를 이어서 물치장터에운 집한 강현면 만세군중은 500여 명은 장세환과 김원식의 지휘하에 구장이 선두에서고,또 도천면(현 속초시) 중도문리 김영경, 부월리 이종순, 대포리 박사집이 인솔하여 물치 장터로 모여든 도천면 일부 군중들과 합세하여 도천면의 집결지인 대포주재소로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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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Ⅱ,7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