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5) 양양경찰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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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5회 작성일 2019-11-0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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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을 하루 앞둔 3일 밤, 임천리에서 태극기를 만들던 중 군수 이동혁에게 발각되어 책임자 22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삼엄한 일경의 감시와 불안 속에 오늘 양양만세운동은 예정대로 질서 있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낮부터 만세운동 주도자는 전날 체포된 책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했다. 또 오늘 장터에서 만세운동 중 체포되어 경찰서에들어가 면 못 나오고 또 들어가면 감금되어 나오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만세군중은 서쪽 서문리에서,남쪽 동운교에서, 동쪽 장터에서 경찰서와 군청 마당으로 신작로를 따라 늘어난 만세운동 군중 수천 명이 노도와 같이 몰려들었다. 경찰서 마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그리고 주도자 몇 명이 경찰서로 들어가 또 경찰서장에게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서 마당과 주변 신작로 거리의 군중의 외침이 한창일 때, 양양 경찰서에체포 구속되어 있는 만세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하기 위해 가평리 구장 함홍기(당시 24세)가 경찰서장 사타쿠를 면담하고 그들을 석방하라고 항의 하는 과정에서 서장실 화로를 집어 들자 그때 경찰서장실에서 옆에 섰던 두 명의 일본 경찰 아끼야마와 오오이시의 칼에 양팔이 잘린 후 목에 칼을 맞아 무참하게 살해되자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군중은 격분해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이때 간리에서 장사를 하던 권병연[(權炳淵)(당시28세)이 뛰어들어가 항의 하자 일본 경찰이 휘두르는 칼에 목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은 뜻하지 않게 만세운동은 더욱 격렬해 졌다.


“구금자를 석방하라”, “구속자를 석방하라”,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두 사람이 피살되는 현장을 목격한 군중들은 돌과 몽둥이를 잡히는 대로 쥐고 군청과 경찰서를 향해 던지면서, 시위진압에 앞장서며 군민을 탄압한“이동혁 군수를 죽여라!”고 외쳤다. 이에일경은 경찰서로 쫓겨 들어갔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도청에서 출장 온 산림 기수 1명은 군청 마당에나 왔다가 군중에게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
이 때 군중 속에있다 가 격분한 상평리 김학구가 경찰서를 향하여 뛰었다.


양양경찰서 마당에서는 탕 탕 탕하는 총소리가 저녁노을을 깼다.
김학구가 쓰러졌다.
앞에 선 사람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낭자했다.


이 때 경찰서 마당에서 김학구는 숨을 거두게 되었다.
계속하여 젊은 청년들이 쓰러지게 되자 시위대가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격하게 항의를 하자 일본경찰들은 계속 총을 발사하여 총에 맞은 부상자는 용천리의 이흥달(李興達), 노병우(盧炳禹),박의병(朴義秉), 한원일(韓元一), 한원팔(韓元八), 남순극(南淳極), 박경화(朴京化), 이두하(李斗夏), 노병택(盧炳澤), 남성극(南成極),  최명옥(崔明玉), 김경숙(金敬淑)등으로 가장 많았고, 그 외 북평리의 용조원(龍照轅), 가평리의 신세묵(辛世默) 등 13명이었다. 그러나 부상자는 이외에도 더 많았다.
부상자가 더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일경에의해 주동 또는 가담 등이 밝혀지면 감옥에 갇히거나 태형(笞刑)을 맞아야하기 때문에일 부러 숨겼기 때문이다.
유혈이 낭자한 시신을 경찰서 뒷마당에 옮겨놓자 노용수가 “끌고 가자!”라고 소리치고 친구들이 모여들어 이형우가 업어서 자기 집 뒷마루 밑에 멍석으로 김학구를 안치하였다.


피비린내 풍긴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끝나 모두 각 마을로 돌아간 일몰 후 적막이 감돌자 ‘나라의 독립을 목적’으로 서면 용천리 주민들은 총상을 입은 최학길(이명, 명옥)의 선동으로 다시모여 양양경찰서로 달려 내려가 적막을 깨고 낮에 희생된 함홍기, 권병연, 김학구의 고혼을 부르며 대한독립민세를 부르다 기진맥진 눈물을 흘리며 어둠을 뚫고 용천리로 돌아갔다.


경찰서장에 덤벼들다 피살당한 함홍기의 시신은 경찰서 내 복도에 가마 니로 덮어놓았다가 10여 일 후 가족에 게 인계되어 마을 주민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을 마쳤으나, 하관(下棺)직후 일본경찰이 파헤치고 관을 깨버렸다. 사설묘지라는 이유와 장례식 때 동네 전 주민이 모여서 울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상황을 강원도장관이 보고한 전신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4월 5일 오전 10:00 접수


“작야(昨夜) 다시 양양군(襄陽郡) 읍내(邑內) 부근(附近) 인민(人民) 약(約) 육백(六百) 읍내(邑內)로 내습(來襲), 읍내민(邑內民) 약(約)오백(五백(百)) 차(此)에 화(和)하여 소요(騷擾)를 극(極)하며 특(特)히 유치인(留置人) 탈감(脫監)을 위하여 경찰서(警察署) 에 침입(侵入) 약탈(掠奪)을 극(極)함으로서 무기(武器)를사용(使用)하여 일단(一旦) 진압(鎭壓)하으나 형세(形勢)불온(不穩), 폭민(暴民)사상(死傷) 있었다.”11)



▶ 권병연의 장녀 권선례의 증언


아버지는 고송고개(일명 말령고개)에있는 이상춘(李相春)이 살던 집에서 엿을 고아 도매상을 하면서 살았다. 일명 엿 덕대라고 한다. 4월4일 함홍기 의사가 오후에 오셔서 아버지를 데리고 나가면서 “어머니 하고 저녁 먹고 있으면 곧 돌아 올 태니 잘 놀고 있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얼마 후 논두렁 가래질을 하던 아저씨들이 선산 댁, 선산 댁하고 불러 어머니가 나가보니 아버지가 경찰서에 구금되었으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놀라서 어머니는 허겁지겁 나를 업고 경찰서 주변을 사방으로 가시철망으로 둘러 설치한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왜경 보초가 못 들어가게 막았으나 무조건 밀고 들어가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애원하였다.


한 왜경이 어머니가 너무 애처롭게 보였던지 솔직히 말해주겠다며 대강 그 경위를 설명하며 죽었다는 것이었다. 말이 떨어지자 어머니는 등에 업은 나를 생각지도 않고, 경찰서 사무실 바닥에 털썩 정신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어머니 등에 업혀있던 나도 그대로 경찰서 사무실 바닥에 뒹굴어 떨어지면서 대성통곡하는 어머니와 같이 울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무실 유리창은 다 깨져 엉망이었다. 왜경은 이렇게 말하였다. “맨손과 총 가진 사람과 싸울 땐 맨손이 이길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우리 집 구조는 방 세 칸에마루 봉방 뿐 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장례를 지낼 때 만세를 부르기 위해 대형기와 수기(태극기)를 만들며 준비를 하였다. 이날 용천 사람  9명이 총상을 입었는데, 이때 경찰서 앞에는 취산루(醉山樓)가 있었는데 이 취산루 돌기둥에 만세 군중이 숨기도 하였다.


함홍기 의사가 서장실로 들어가 화로를 들어 서장을 내려치려고 하니 일본도로 옆구리를 찌르며 오른팔을 다시 일본도로 내리치고 또 왼손으로 의자를 들어 치려고 하니 그 다음에 는목을 쳤다고 한다. 뒤 따라 권병연 의사도 또 달려드니 또다시 일본도로 목을 쳐 쓰러졌다. 뒤이어 달려 들어가던 김학구 의사도 왜경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시체를 찾으려고 하니 내어 주지 않다가 음력 3월 15일 경 일반 구속자를 석방하고, 16, 17일경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행상(상여)을 가지고 경찰서로 들어가려고 하니 못 들어가게 하여 들것으로 운구를 하기로 하고 그리고 만세를 부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큰 기와 큰 태극기는 전부 불태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태극기만 행상 틀에 꽂고 새이골(현 간리)에 장례를 마쳤다.


3년 상을 마치고 왜경의 감시 눈을 피해5월경 우리 모녀는 이사래야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만 싸가지고 대관령을 넘어 걸어서 허기를 참지 못하여 어머니가 따주는 딸기를 먹으면서 며칠 동안 기진맥진 걸어서 고향인 영월 주천까지 갔다.
그 후 고향으로 이장하였다. 이세원(새말댁 할아버지, 당시 사슴을 키웠다)가 도와주어서 왜경 모르게 이장하였다. 1940년 10월경 영월 주천 마래미에있는 집 근방에 밭에 가매장했다가 신일리 나르신(공동묘지)에 모셨다. 그 후 권병연 의사의 처도 이곳에 쌍분으로 모셨다.


장녀 권선례(權先禮)
주소: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1135
본적: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268



▶ 이종우 선생의 증언


양양 3‧1만세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심한 부상을 당하였던 손양면 수여리 이준재(李俊在) 옹이 몸소 겪은 사실을 그의 자제인 이종우 선생의 부친의 체험담을 정리한 내용으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3‧1만세 운동 당시의 양양인의 아픈 사연이라 소개한다.


1919년 4월 4일 각 마을 구장의 인솔 하에손 양면 송현리 고송고개에 집합하여 청년들이 앞장서고 노 장년층과 부녀자들이 뒤에이어 오던 중 월리를 거처 남대천 나무다리를 건너 당시 동운교(東雲橋)를 건너 양양장터 마당에 각 면에서 모인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만세운동에 참여 했었다.
장마당에 솔선하여 참여한 인원이 인산인해였으며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 소리 높이 울려 퍼지자 왜경들은 놀라 경찰서 마당에 모여 만세군중의 동태를 살필 때 날은 저물어 가는데 전날인 4월 3일 임천리에서 체포된 이석범 선생과 마을주민들의 석방을 외치며 손양면 청년들이 맨 앞에서서 만세를 부르며 전진하다가 왜경의 저지선을 뚫고 양양경찰서로 진입하였다.
그때 체포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거부하는 일경들과 격렬하게 대치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에 격분한 청년들 선두에서 혈기가 넘친 가평리 구장 함홍기가 경찰서장실로 들어가 화로를 집어던지려하니 서장을 호위하던 순사가 일본도로 화로를 든 두 팔을 내려치고 이어 허리와 배를 찔러 쓰러지는 것을 보고, 간리에 사는 권병연이 격분하여 서장실로 들어 닥치니 서장을 호위하던 순사가 역시 권병연에게도 일본도로 내려치는 것을 본 우리군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경이 일제히 사격하므로 우리 군중은 더 이상 돌진하지 못하고 총소리를 뒤로하고 모두 엎드리며 흩어지는데 나도 겁에 질려 동운교 쪽으로 도망쳐 나오는데 계속 총소리가 나므로 당시 제방 둑 넘어 월리 쪽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데 총소리가 나지 않으므로 상황이 어떠한가 보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고노야로”라고 소리치는 일경이 인정사정없이 군화발로 안면을 걷어차니 나는 순간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자리에쓰 러졌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앞니가 모두 부러지고 피투성이인데 왜경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 일어나 밤이 되어 집으로 들어와서 응급처치를 하고 누어있으니 두려움과 억울함 그리고 적개심에만 감이 교차하였다.


때는 논 가래질을 할 시기라 가래질 질을 짜고 4월 9일 아픔을 무릅쓰고 퉁퉁하게 부은 얼굴을 싸 동이고 송전리 앞 쌍호 부근 논에서 가래질을 하고 있는데 만세소리가 들려오므로 나를 비롯한 가래질 일꾼들 모두 몸도 씻지 않고 그대로 양양 장마당으로 달려가 입이 아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나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일 경에 맞았다는 사실도 두려워 이 사실을 숨기고 살았으며, 만세운동 후 10여년이 지나니 그나마 성치 않게 남아있던 이마저도 한대도 없이 모두 빠져 평생 동안 먹을 것도 편하게 먹지 못하고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삶을 살았다. 끝.


이와 같이 양양에는 가슴앓이 하는 슬픈 사연을 가진 가정이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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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Ⅱ,713-7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