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4) 양양장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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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47회 작성일 2019-11-0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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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장터에는 각 마을 구장들이 선두기를 앞세우고 들어오면서 “대한 독립 만세” 선창하면, 군중이 따라 외치며 다섯 개의 통로를 따라 물밀 듯 들어오니 온 읍내와 장터가 만세소리로 가득 찼다.양양감리교회의 청년회 김필선,김계호 등과 교인들은 주민과 장꾼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는 한편 “대한 독립 만세” 선창하면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의 상황을 강원도장관이 작성한 전화보고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4월5일 오전0:30 접수


“본일(本日) 편(扁)히 양양군(襄陽郡) 읍내(邑內) 부락(部落)으로부터 야소교도(耶蘇敎徒)를 중심으로 한 수백명(數百名)의 일단(一團)이 읍내(邑內)로 진입(進入)하려 함을 저지(沮止)함에 읍내(邑內) 배회자(徘徊者) 수백명(數百名)과 호응(呼應)하여 만세(萬歲)를 창(唱)하다. 주모자(主謀者)를 검거(檢擧)하고 해산(解散)시켰으나 상(尙)불온(不穩)의 상태(狀態)이다.”10)


이와 같이 양양면, 서면, 손양면 만세군중이 만세운동 당일인 4월 4일 오전 11시경 집결지인 양양장터에 모두 모였다.
양양장터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철시가 된 줄도 모르고 장 보러온 사람들까지 모두 4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대한 독립 만세’를 불러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부근에 전달되니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까지 모두 참가하였다.증언자 용조원(龍照轅)의 말을 들으면 서면 북평리에서는 나가지 않고 농사를 짓기 위해 도랑을 파고 있었는데, 이날 낮에 갑작스런 회의가 열려 일하던 사람이 모두 삽과 괭이를 버리고 양양장터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였다.


김종현은 양양보통학교 학생(당시10세)으로 독립만세운동 대열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다가 일경에체 포되었으나 나이어린 학생임을 감안하여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같이 양양 독립 만세 운동은 양양군의 남녀노소와 어린학생이 동참한 운동이었다.


점심때를 전후하여 만세소리와 태극기의 물결이 장터와 경찰서,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군청주변의 취산루(醉山樓)를 메우고 흡사 독립을 쟁취한 듯이 만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경찰서와 군청 마당 근처에도 군중이 모여 있었고, 또 뒷산에도 군중이 모여 군청과 경찰서를 내려다보면서 만세를 불러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축제 분위기에 서 한편에 는 복수심에서 온갖 구호를 외치며 만세를 부르니, 마치 독립을 쟁취한 듯 만족스러운 분위기 가운데 질서 있고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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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Ⅱ,713-7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