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2) 4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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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8회 작성일 2019-11-0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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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4일 양양장날 날이 밝았다. 양양에 입수된 독립선언서가 3월 하순이었기 때문에 준비 기간이 매우 짧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석범 선생과 임천리에서 마을 책임자 일부가 전날인3일밤에 체포되었기 때문에불 안과 긴장감이 더했다.


그러나 4월 4일은 양양 장날로 양양군에서 첫 번째로 독립 만세 운동이 들불 같이 일어나 산불처럼 타오른 날이다. 4월 1일 각 면의 책임자가 이교완의 집에서 결의한대로 진행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손양면 송현리 마을 만세군중은 먼저 들어와 장터와 군청, 경찰서가 내려다보이는 구교리 뒷산에 모여 최인식,김재구,김필선,김계호 등과 함께 첫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양양3‧1만세운동의 첫 신호탄이 울린 것이다. 만세소리가 얼마나 컸는지는 이십 여리 덜어진 손양면 수여리 이준재(李俊在)는 아침에논을 다듬는 일을 하다가 만세소리를 듣고 일을 중단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오늘은 양양면, 서면, 손양면이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실행하였다.
양양읍내에들어오 는 중요한 통로는 다섯 개가 있었는데, 4월 3일 사전에 탐지한 양양군수는 양양장터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 다섯 곳에일 경을 배치하여 처음에는 길목에 서“오늘 양양 장은 철시했으니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당시 일경의 힘으로 장날의 수천 군중을 수색하거나 막을 수는 없었다. 태극기도 두루마기 속에 감추었기 때문에만세 군중을 일일이 수색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총을 겨눌 뿐이었다.


각 마을 지도자들은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각 마을 주민의 행군 대열 앞에 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행진했다.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났지만 장터에 오는 도중 또는 장터에와서 만세 군중으로 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