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7) 현북면의 만세운동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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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91회 작성일 2019-11-0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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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 독립 만세 운동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기사문리 만세운동은 3월 27일 임천리 본부에서 현북면 연락을 맡은 원일전리 유학자 박규병(朴奎秉)과 서당 훈도인 이성윤(李聖允), 감리교인 오세옥(吳世玉)이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 것으로 시작하였다.


한편 상광정리에있 던 감리교회의 오세옥, 이응열(李應㤠) 권사는 양양군 관내의 양양감리교회 및 물치 감리교회와 연락하여 만세운동의 정보에 따라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림세력과 감리교회 세력이 연합한 계획은4월9일 양양 장날 양양읍내 양양장터까지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양양군 현북면 면내의 유지급인 중광정리 임병익(林秉翼)과 해주 오씨 호족으로 덕망이 있는 오정현(吳鼎鉉)을 참여시키고 각 마을의 구장들이 모여 역할을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복사 책임자는 박원병(朴元秉), 태극기는 구장들이 맡아서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를 수기로 만들었으며, 연락 문서인 통문은 면서기의 경력을 가졌고 학문이 밝은 오정현이 담당하였다. 마을마다 뛰어다니며 연락하는 책임자는 교회청년 이응열과 상광정리 포수 김종대(金鍾大)가맡았다.그리고 이 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힘을 발휘한 각 마을의 책임자 구장은 상광정리 김익열(金益烈),중광정리 김우근(金禹根), 하광정리 김진혁(金振赫), 명지리 권광식(權廣植: 본명權彦植), 대치리 김종성(金鍾聲), 말곡리 김창환(金昌煥), 원일전리 박용기(朴容琦), 도리 김재한(金在漢), 어성전리 김두칠(金斗七)이었다.


광정교회는 교회간의 연락으로 만세운동의 정보를 입수하였고, 또 오세옥과 친척관계인 손양면 가평리의 함홍기(咸鴻基)와연락이 되어 있었다.


원일전리 유학자 박용규 형제와 감리교회의 청년 오세옥, 이응열 권사는1919년 3월 초순 이래 조선 내 각지에 서 조선독립 만세 운동이 태극기만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취지에 찬동하여 자기 마을과 교회에서도 그와 같은 행동으로 옮기고 나아가 독립운동에이바 지하려고 하던 차에 유림과 기독교인 그리고 각 마을 구장이 삼위일체가 되어 합력하여 모든 계획을 추진하여 실행해나가고 있을 때, 박원병이 등사를 하려고 소지하고 있던 독립선언서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박원병의 형 박규병은 전체 계획에서 독립하여 4월 7일 박용규와 이성윤이 만세운동을 벌여 이성윤은 은신했고 박용규와 박규병은 체포되었다.



<표7>현북면 조직


책임자    

오세옥,박규병,이성윤


마을 책임자
상광정리 김익열    말곡리 김창환
중광정리 김우근    원일전리 박용기
하광정리 김진혁    도리 김재한
명지리 권광식     어성전리 김두칠
대치리 김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