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6)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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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03회 작성일 2019-11-0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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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 계획을 이석범 선생은 이국범과 이재훈이 추진하게 하였다.


강현면은 장세환(張世煥),도천면은 김영경(金英經)을 책임자로 하여 마을단위의 구장을 중심으로 조직망을 형성했다. 장세환, 김영경은 쌍천서숙 동문으로 쌍천서숙 졸업생들이 이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도천면은 대포리의 박사집(朴士集),부월리의 이종순(李鍾淳)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1919년4월4일 밤 양양군 도천면 중도문리 전주 이씨 종갓집인 이종국(李鍾國)의 방에서 대형 태극기를 만들고,다음 날인5일 양양군 강현면 물치리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마을 사람들과 계획하였다.


강현면에서는 마을 구장을 중심으로 책임자를 두고 진행하였다.적은리 장세환, 물치리 김두영(金斗榮),박제범(朴劑範),김대선(金大先)등이 맡아서 태극기를 만들며 참가하였고, 강선리 전달원(全達元), 윤순범(尹順範), 이종엽(李鍾燁), 하복리 이철우(李喆雨), 이형우(李炯雨), 중복리 김창렬(金昌烈), 심한준(沈漢俊), 간곡리 추병원(秋秉元), 장산리 양익환(梁益煥), 회룡리의 박봉래(朴鳳來), 침교리 김원식(金元植), 김진선(金振璇), 사교리의 김철기(金鐵起), 김환기(金桓起), 주청리 김경도(金敬道) 등이 태극기를 만들며 자기 마을을 맡아서 추진하였다.


그리고 각 마을의 연락책은 침교리 김원식(金元植)이 장세환의 지시에 따라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알렸다.이처럼 강현면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찍이 3월 23일부터 만세운동이 완전하게 계획되었음이 매곡 오윤환8)선생의 일기에서 유추 할 수 있다.
3월 23일 이동렬(李動烈: 본명 李載型)이 양양의 유지이자 한학자로서 상도문리 서당 훈장으로 활동하는 매곡 오윤환 선생을 심방하고 또 4월1일 이능렬(본명 이재훈)이 심방하였으니 이때 3‧1만세운동 계획과 전개에대하 여 충분한 자문을 받고 동의를 얻었으리라 본다.


매곡 일기에 4월 14일 매곡선생께서 양양경찰서에 끌려가 4일간 구금되었다가 4월18일 방면되었는바 고문과 몇도(度)의태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석방 된지 보름이 넘도록 장독[(杖毒): 심한 매를 맞은 상처의 독]의 고통을 호소하며 누워서 괴로워하였다라고 5월 2일자 일기에기록 되어 있으니, 이 같은 일제의 악랄함이 얼마나 지독하였는가를 실존하는 매곡선생의 친필 일기로서 거듭 천명(闡明)하게 된다.



<표6>강현면·도천면 조직


책임자

장세환, 김원식


강현면 마을 책임자
적은리 장세환
물치리 김두영, 박제범, 김대선
강선리 전달원, 윤순범, 이종엽
하복리 이철우, 이형우
중복리 김창렬, 심한준
간곡리 추병원
장산리 양익환
회룡리 박봉래
침교리 김원식, 김진선
사교리 김철기, 김환기
주청리 김경도


도천면 마을 책임자
중도문리 이종황
대포리 박사집
부월리 이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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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양주지,양양군,1990, P.926
호는 梅谷자는 聖彬이라 하며 상도문리 오씨 문중의 불출세 한학자이시다. 세칭 오학자로 통하며 한시의 대호, 경학의 대가로서 추종할 분이 없다.
성격이 준엄하고 無言의 敎로서 훈도하여 많은 제자를 냈다. 終日終夜不解冠하고 단정히 끓어 앉자서 敎導하셔서 인격자를 교육하시고 3‧1독립만세에 참가하여 태형을 받은 애국자이시다. 후손이 매곡유고를 출판하니 선생의 면모가 더욱 빛났으며 지금도 오학자로 존경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