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8. 천도교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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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67회 작성일 2019-11-0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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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유림들은 동학군의 세력이 확산되자 양양에서 동학군을 토벌할 정도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1860년 최재우(崔在宇)가창시한 인내천(人乃天)동학사상이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에의 해 양양에유 입되었다.최시형은1869년3월부터 1870년 10월까지 양양 산중에은 거하면서 포교하였다.최재우의 장남 최세정(崔世貞)은 인제, 양양 등지로 피신생활을 하면서 이 지역의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동학에대 한 탄압이 심해지자 양양 김덕중의 집에 머물다 더 안전한 첩첩산중인 인제 귀둔리로 거처를 옮겼다. 귀둔리는 오색령과 점봉산에인접 해 있어 귀둔리에 서 양양이 80리 정도 되는 거리를 곰배령을 지나 양양 북암령(소동라령)을 넘어 양양 장을 이용하였다. 이때 최시형에의해 포덕(布德)된 양양의 신도들은 서로 오가며 신앙생활을 함께하였다.


양양, 인제, 영월, 정선 지방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이 점차 뿌리를 내려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확장되면서 농민들은 불만이 늘어나고,1894년 고부에서는 민란이 일어나 점차 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농민군은 가장 큰 사회 모순인 양반 신분제를 타파하는데 앞장선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 수탈과 불평등 관계를 시정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군 토벌대가 증원되고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의 파견으로 전국에서 농민군은 패퇴되고 동학 농민군은 더 깊숙이 숨어들었고 농민군은 신분을 숨기고 술집이나 엿 장사로 살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