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7. 기독교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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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34회 작성일 19-11-0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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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보수적인 유림들은 현산학교와 감리교회에대해 부정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선교활동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만세운동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양양문화의 일원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양양감리교회는1901년10월 5일 캐나다 하디 선교사가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설립하였다.
이어 1908년 백설화에의 해 양양읍 조산리에조 산감리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이후 1910년 경 충청도에서 안순학이 강현면 물치리에사는 처남 이덕운을 찾아 이사를 온 후 기독교 복음을 전하여 강선리 전달원이 제일 먼저 기독교인이 되고 자신의 집을 예배장소로 제공하면서 전달원의 처남 김도일, 한문훈장 오현영 등에의해 강현면 물치리의 물치감리교회가 설립하였다.
이풍운 목사는 1885년 3월 23일 현북면 기사문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엔 한문을 배우고 년 월 1910 4 5일 세례를 받았으며,그 후 현북면의 상광정리에 광정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양양지역에는 4개의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양양감리교회 내에는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엡웟청년회는 당초 순수 신앙 단체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회와 성경공부 외에도 시사성이 있는 토론회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적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대거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충군애국(忠君愛國)’과‘국권회복(國權回復)’을추구하는 민족주의 교인들이 참여하면서 엡웟청년회는‘애국운동 단체’의 성격을 갖게 된다.이때 부흥운동과 남궁억 선생, 김영학 목사의 애국독립사상의 영향으로 민족주의적 사상이 발전하였다.


양양감리교회 조영순 전도사는 양구교회에서 활동하다가 양양 감리교회에부 임하여 목회활동을 하면서 양양 지방의 근대사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었다. 그의 딸 조화벽을 16세에 원산 성경학교로 유학을 보내 성경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다시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보내서 애국심을 길러 3‧1독립만세운동과 양양 3‧1만세 운동 뿐 아니라 한국독립운동사에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성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