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6. 현산학교 교육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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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33회 작성일 2019-11-0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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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학교는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이다. 양양은 초등교육기관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체결로 국권을 빼앗겨 일반 국민은 국권회복을 위해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계몽강연, 언론활동, 교육구국운동, 청년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남궁억(南宮檍) 선생은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각과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남궁억(南宮檍)선생은 근대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으로1905년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성주목사를 사임한 뒤 귀경하였다.


남궁억 선생은 고종 42년 을사(1905) 12월 26일 양양군수로 임명받고,1906년 2월에 부임 하여 학교를 세우기 위해 기부금을 모았다. 하지만 대부분 지방 유지들은 비협조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자기 문중을 통해 기부금을 모으고 이를 기본금으로 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어렵게 세운 학교가1906년 9월 8일(음력7월 20일)에동헌 뒷산에 개교한 현산학교 였다.


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자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호별 방문을 통해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반 강제로 자녀가 있는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한 명씩 학교에 보내도록 했지만 몰래 서당으로 보내는 일이 일어났다. 남궁억 선생은 형리를 시켜 그를 데려다 묶어놓고 볼기를 치게 했다.


“양학을 하면 혀가 꼬부라지느니, 눈알이 노래지느니, 난리가 나면 죽느니”하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자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학생이 200명, 학제는 3학년 과정인데 학생들의 나이는 17~8세까지 상투를 튼 학생도 있었다. 남궁억 선생은 직접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산수, 역사, 일어, 체조, 국문과 한문도 가르쳤다.

또한, 남궁억 선생은 조림사업과 축산을 장려하고 청년회를 조직하여 애향심과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주적 역량을 기르는데 열정을 쏟았다.그러므로 3‧1독립만세운동 당시에 현산학 교 졸업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양양에는 1898년 정부로부터 “공립소학교 특설령”이 지방에하 달되면서 소학교 설립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유림들의 반대운동으로 좌절되었다. 이항렬, 최영삼이 향교 소유인 밭과 기타 재산으로 소학교 설립을 주도했으나 군내 유림이 ‘소학교 설립 반대’를 결의하여 좌절되었다.
그 이후 양양군수로 남궁억 선생이 부임하면서 양양의 신문화 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현산학교는 수업료는 없었고 공책과 연필을 무료로 공급하였다. ‘국권갱생(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하나인 교육 밖에없다 ’라는 교육 정신을 내걸어 민족주의 정신을 고양시키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영향으로 현산학교 출신들은 당시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