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5. 농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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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72회 작성일 2019-11-0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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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서론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양양지방은 한반도 중심부에위치한 장엄한 설악산의 정기를 받으면서, 열정적인 동해와 접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에의하 여 양양인은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지리 환경 속에서 외부세력과 간섭에 야합하지 않는 배타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다.


예국(濊國)시대이래 마을마다 종족마다 상부상조하는 계 문화와 두레가 발전되어 왔고, 또한 마을마다 마을의 안녕과 대동단결, 마을의 수호를 위한 성황문화가 발전하여 왔으며 이에농상(農桑)에 힘써오면서 국가와 지방에 변고가 있으면 자발적으로 계 조직을 통하여 구휼(救恤)함으로써어려움을 같이하였다.
특히 나라에국상 (國喪)이 발생하면 경성을 향하여 망곡(望哭)하고 일부 가정에서는 뒤란에 임시 제단을 설치하고 조석(朝夕)으로 망곡하기도 하였으며, 농민들 스스로 국상을 같이 입는 애국충정의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국권이 쇠하여 일제가 강점한 비참한 사회 환경 속에서 농민들에 대한 핍박으로 궁핍은 날을 더해가는 때에 1908년 6월 일본경찰이 손양면 송전리에서 부녀자를 희롱하면서 무고한 농민을 3명이나 살상하는 등의 만행을 꺼리 낌 없이 자행하였으니 농민사회에서는 일제에 대한 철천지원한(徹天之寃恨)이쌓여갔으며 농민사회에서의 분노는 어느 때이든 폭발할 것이 예견되었었다.


이러한 민심이 바탕이 되어 조직적으로 전개된 양양의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에 희생을 무릅쓴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벌였으니 이는 농촌 가정을 소중히 여긴 양양인의 주인의식의 특성이며 일제에대한 저항운동으로 농민이 단합하여 양양인의 자긍심을 잘 보여 주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