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3. 일제의 침탈과 만행

페이지 정보

조회 1,347회 작성일 2019-11-05 16:21

본문


일제의 만행은 1908년 6월 손양면 송전리 쌍호에오리 사냥을 온 일본순사가 송전리 고씨 집안에서 베를 짜고 있던 부인을 보고 희롱하자 당시 이 마을 서당 오산재에서 훈장을 하던 고익주가 분개하여 일본인을 꾸짖고 추방하려 하자 이에무 참히 총으로 사살 시켰다. 이를 목격한 고혁주와 고광하가 항의하자 역시 차례로 흉탄에 맞아 즉사하였다.


1910년 이후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통하여 무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하면서 산림령, 광산령, 어업령을 내려 이 지방의 산업을 침탈하였으며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을 내려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농민들의 토지를 약탈하여 농민들은 생활이 곤란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강화는 신문화의 강요와 함께 경제적 착취로 이어지게 되면서 보수적인 유림과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진보적 청년에게 식민지의 각성을 만들게 되었다.

본격적인 항일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1907년군대 강제 해산 이후 군대가 의병에 합류하면서부터이다. 1907년 8월 19일에의 병 대장 우수길(禹秀吉)이 부하 약 200여명을 거느리고 양양을 공격하고 토벌대와의 교전 중 우편물취급소와 경찰주재소를 파괴하고 명주사 부근의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동년(同年)11월3일에는 민긍호(閔肯鎬)가박췌남(朴萃南), 주광석(朱光錫) 등과 함께 약 4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양양으로 진입 경찰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현산학교와 민가 2동이 불에 타는 등 민재가 발생하였으며 의병은 경찰서를 파괴하고 퇴각 피신하였다.
1908년 5월 6일에는 이강년(李康年)이 부하 300여 명을 거느리고 양양을 공격하여 양양군청 뒷산에서5시간동안 치열한 전투를 하고 퇴각 피신하였다.
양양에 서 이와 같이 항일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첫째, 초기의 의병활동은 주로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는데 양양지방에는 유림세력들이 당시 이 지역을 이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양양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에는 포수(砲手)가많았기 때문에의 병들의 전투력 향상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셋째로는 산악이 많은 이곳은 의병들의 유격전 활동에지리적 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이며, 나아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의병들의 활동은 불가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