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2. 역사 문화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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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91회 작성일 2019-11-0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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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가 온화하여 일찍부터 문화가 크게 번성하여 BC 6000년경의 오산리 선사유적이 우수한 신석기 시대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가 고조선 옛 땅을 점령했으나 토착세력에 밀려나면서 자치세력이 형성된다.이 무렵 영동지역은 동예(東濊)와 실직국(悉直國)이 있었다.양양은 동예의 후손으로 집단적인 생활의식을 하였고, 가무와 유희의 제천행사를 하는 등 문화예술을 즐기면서 살았다.승지(勝地)를 찾아 술과 놀이를 즐긴 풍속은 천성이 순박하고 낙천적인 성품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고구려에속 하였지만 후기에는 신라에속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제6대 태조4년(56) 7월 함남지방의 동옥저를 정벌하고 동으로 창해로 진출하였다. 19대 광개토대왕 18년(409)동해안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하였다. 제20대 장수왕 42년(454)에 신는라의북방을 정벌하였다.장수왕 56년(468)2월 말갈군사 2만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삼척]을 공격하여 삼척 이북의 모든 땅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제21대 문자왕(文咨王)5년 (496)신라의 우산성[牛山城:청양)]을 공격하자 신라는 군사를 보내어 니하[泥河:강릉]상류를 공격하였다. 니하는 양양 남대천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양양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으로 분쟁이 계속되었다.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102)삼척지방에있 던 실직국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신라에 편입하였다. 제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14년(125)고구려의 침입으로 니하 남쪽까지 퇴각하였다. 제6대 지마이사금 11년 하슬라 사람 15세 이상을 징집하여 니하에서 성을 쌓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영토였던 양양을 신라가 자주 침입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니하는 양양의 남대천으로 양양지역은 고구려와 신라의 격전지였다.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때 신라가 고성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제21대 소지마립간3년(481) 2월 북열성[北列城:안변]에 행차하여 군사를 위문하고 군복을 하사하였다. 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6년(505) 실직주[悉直州:삼척]에 이사부(異斯夫)를 군주로 삼았다.이때 비로소 동해안의 삼척지역은 확실한 신라의 세력을 형성하였다.지증마립간13년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정복하였다.


양양을 고구려에서는 익현현(翼峴縣)또는 이문현(伊文縣)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성군의 관할을 받는 익령현(翼嶺縣)으로 바뀌게 되었다. 수성군은 익령현과 오늘날의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치소가 있었던 동산현(童山縣)을 영현으로 거느렸다. 익령현은 통일신라시대에불교의 성지로 화랑들의 순례지 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낙산사의 의상, 범일, 영혈사의 원효, 진전사의 도의,오색석사의 법성, 무염, 억성사(사림사)의 염거, 체징, 홍각선사 등의 고승들이 불법에정 진한 불교도량지로서의 전성을 이루었다.


『근재집』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17년(1330) 안축(安軸, 1287~1348)이 강릉도존무사로 있을시 관동지방을 돌아보고 빼어난 풍광을 읊은 관동별곡 제6장에 양양(襄陽)의 지명이 나온다.이처럼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성지이고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이었다.
신라는 불교국가로, 이상적인 인간은 화랑이나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으로 그 유적들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양은 대체로 전기에는 익령현,후기에는 양주(襄州)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제6대 성종(成宗)때 10도제가 실시되면서 익령현은 삭방도(朔方道)에속 하게 되었다. 제8대 현종 때에지 방제도가 오도양계(五道兩界)로 고쳐진 뒤 양양지방은 東界에 속하였으며 현종9년(1018)에 사도호부 팔목(四都護府八牧)을 둘 때 현령이 파견됨과 동시에동산현(洞山縣)을 속현으로 하였다.제23대 고종8년(1221) 몽고군을 격퇴시킨 공이 있어 양주로 승격되고 방어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종41년(1254)에 주양성이 함락된 후(고종44년 1257) 몽고군에게 항복하여 덕령감무(德寧監務)로강등되었다가 제24대 원종원년(1260)에 는 다시 양주로 회복되었다.
고려조는 북방민족의 침입과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여진족과 거란족, 몽골, 왜구가 침입했다.


조선조 왕조(1392년창건)를 보면, 조선왕조를 창건하면서 양양을 특별히 관리해 왔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의 외친향(外親鄕)이기 때문이다. 조선조는 태조6년(1397) 1월에 양주를 임금의 외친본관이기 때문에부로 승격시켜 양주부라고 하였다. 태종13년(1413) 예(禮)에 따라 양주부를 왕조의 외친향이라 하여 양주도호부로 승격하였다. 태종16년(1416)양주를 양양이라고 개칭하여, 양양도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선왕조에서 특별히 관리해 왔다. 왜 이곳을 양양이라는 지명으로 개칭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동해신묘와 조선왕조의 외친향이라는 이유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동해의 신을 모시는 해가 떠오르는 고을로,조선왕조의 태동이라는 의미로 양양이라는 명칭을 나라에 서 정하였다. 조선왕조의 뿌리를 양주에서 양양으로 개칭하고 자신의 뿌리를 양양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태조실록권일, 총서에의하면 ,낙산 관음굴에서 기도하여 도조인 이선래를 낳았다.
즉, 낙산사 관음굴은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의 후사를 점지한 기도처로 해마다 강향사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고 사전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낙산사는 궁중불교의 도량으로 이름 하였다. 세조는 낙산사에행 차하여 사찰을 중수하고 홍예문을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와 부인이 여기서 빌(기도)어 도조를 낳았다고 하여 아기 빌이 굴로 알려졌다.그러므로 낙산사는 조선왕조의 출생지로 기록되어 있다.그래서 성종실록에의하면 정희왕후(세조비)가 일년에 쌀 백 섬씩 낙산사에하사하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양양이라는 지명은 조선조 태조6년(1397) 외친향(外親鄕)7)이라 하여 부로 승격하고 태종 13년(1413) 도호부로 고쳤고 16년(1416) 양양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조와 조선조에 북방민족과 왜구가 자주 침범하면서 고난을 겪었지만 양양인은 단합된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였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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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조 『太祖實錄』권 1에 의하면 翼祖이곳에 거주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들이 없으므로 최씨와 함께 낙산 관음굴에서 기도하였더니 밤에 꿈에 한 승복을 입은 중이 와서 고하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善來라고 하십시오.’하였다.  얼마 안가서 아이를 배어 과연 宜州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마침내 이름을 善來라고 했으니 이분이 度祖이다. 관음굴은 지금도 양양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산사 관음굴은 이태조의 조부인 度祖의 후사를 점지한 기도처로 이태조는 해마다 강향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사전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낙산사는 궁중불교의 도량으로 이름 하였다. 세조는 낙산사에 행차하여 사찰을 중수하고 홍예문을 축성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권11 6년(1397) 1월 24일(정축) 강원도 양주를 승격하고 부로 만들었으니 이는 임금의 외친 본관이기 때문이다.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가 비 정숙왕후가 여기서 아기를 빌어 도조를 낳았다고 하여 아기빌이 굴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임금의 외친이라는 말은 도조의 첫 번째 부인이 간성의 박씨朴得賢의 딸이기 때문이다. 낙산사는 조선왕조의 출생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왕실에서는 그 보답으로 낙산사를 중창하고 봄가을 제를 올렸다. 특히 세조는 낙산사에서 정성을 다 하였다. 태종실록 권10 5년(1405)11월 21일 의정부에서 불교의 퇴폐상을 열거하고 금산사 등의 토지와 노비를 환수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에 따랐으나 낙산사는 제외하였다. 태종실록 권32 16년(1416)8월 10일 군현의 칭호를 고치었다. 이조에서 소리가 서로 비슷한 각 고을의 칭호를 고치도록 칭하니 이에 襄州를 襄陽이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권208 18년(1487) 10월 5일에 의하면 정희왕후(세조의 비)가 일 년에 쌀 백 섬씩 낙산사에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