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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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15회 작성일 19-11-0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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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3‧1독립 만세 운동의 성지(聖地)이다. 양양이 만세운동의 성지가 된 것은 오랜 역사와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수한 문화와 함께 풍요로움으로 인해 일찍부터 문명의 삶을 살았던 기록으로 이중환의 『택리지』에다음 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저(大抵)살 곳을 택할 때 처음에 지리(地理)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생리 인심 산수(生理人心山水)를 돌아본다.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고을이 못된다.지리가 아름답고 생리가 좋지 못하면 오래 살 곳이 못되며, 생리가 좋고 지리가 좋지 못하여도 역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다 해도 인심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이고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맑은 정서를 기를 수 없다.”1)


인간의 성품은 지세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양양은 한반도의 중심부분에 위치하며 장엄한 설악산의 정기와 열정적인 동해를 접하면서 강인한 정신과 우수한 문화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 왔다. 이처럼 양양은 지리적으로 풍수가 뛰어나 풍요와 넉넉한 마음으로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생활하였다.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와 평야에 남대천이 흐르면서 풍부한 음식과 기후가 온화하여 선사시대부터 남대천을 중심으로 오산리와 도화리에서 삶이 시작되었다. BC 6000년경의 오산리 선사유적이 신석기 시대임을 증명하고 있다.


양양인은 동예(東濊)의 후손으로 집단적인 생활을 했고, 가무와 유희의 제천행사로 문화 예술을 즐기면서 살았다. 승지(勝地)를 찾아 멋을 즐기는 풍속으로 천성이 순박하고 성품이 낙천적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을 먼저 점령한 것은 통일을 위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신라는 불교를 통한 일심(一心)과 불국정토(佛國淨土)를 통해 이 지역을 관리해 왔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양양의 불교는 불교의 성지(聖地)답게 우수한 문화유적이 전해 오고 있다.이처럼 전통적으로 양양인은 하나 된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여지도서』[(영조33년) 1757-1765]와 『관동지』 풍속 조에 양양인의 성품이 잘 나타나있다.


務農桑恤喪葬喜遊宴貴禮儀(무농상 휼상장 희유연 귀예의)
◯ 務農桑(무농상):농사일과 누에치는 일에 힘쓰고
◯ 恤喪葬(휼상장):장사지내는 일과 상중에는 도우며
◯ 喜遊宴(희유연):놀이로 베푼 잔치를 즐겨하고
◯ 尙文學(상문학):학문을 숭상하면서
◯ 貴禮儀(귀예의):예의를 빼어나게 숭배한다.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하며 함께 즐겁게 생활을 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양양인의 풍속과 성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삼국시대 양양은 불교의 성지이고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이었다. 양양의 역사를 말하면서 화랑의 역사를 제외하고 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양양은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화랑은 그 명예에어 울리는 교육방법이 있었다.


◯ 相磨以道義(상마이도의):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 相悅以歌樂(상열이가악):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 遊娛山水(유오산수):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 유람하였으니
◯ 無遠不至(무원부지): 멀어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화랑들의 순례지인 양양이 의리의 고장, 문화예술의 고장, 최고 관광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화랑들의 전통이 오늘날 양양의 문화에영향을 주었다.


양양은 대표적인 유림사회2)이다. 양양의 유림들은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조선조는 왕조의 외친향(外親鄕)이라 하여 양양을 부(府)로 승격하고 특별히 관리해 왔다3). 그리고 양양도호부건물을 왕궁의 형태로 축조하면서 양양의 유림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조선조 유가사회가 망하자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하고 만세운동을 통해 조선왕조에대한 의리와 충절,그리고 나라사랑의 마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당시 상황을 강원도장관이 총독부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한 4월 7일 전화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양양군 대포(大浦)를 습(襲)하려 한8백 명의 군중(群衆)작(作)6일에 지(至)하여 천이삼 백명에 달하여 읍내(邑內)를 습(襲)하으나 병력(兵力)을 공(恐)하여 폭행(暴行)한 불온(不穩)주모자(主謀者)7명을 인치(引致)함에 차(此)의 인치건(引致件)을 경찰서장(警察署長)에게 청원(請援)하으므로 간유(懇諭) 퇴산(退散)케 하다. 상(尙) 동군(同郡) 현북(縣北)현남(縣南)의양면(兩面)민심(民心)동요(動搖)불온(不穩)의조(兆)있음”4)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9개면 132리 중 6개면 82리에서 6000명이 참가하였다고 기록5)하고 있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그 규모를 축소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그 규모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막강하였다.
유림의 고장답게 다른 지역6)에 비해 3‧1독립 만세 운동이 치열했던 것은 양양 향촌사회의 역사와 문화에서 기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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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擇里志』
擇里志大抵卜居之地地理爲上生理次之次則人心次則山水四者缺一非樂土也地理雖佳生理乏不能久居地理雖好
地理惡則亦不能久居地理及生理俱好而人心不淑則必有悔吝近處無山水可賞處則無以陶瀉性情

2) 유교문화의 유적으로 향교,서원,사우,루정,효렬각,신도비 등이 있다.
양양의 유교문화유적은 향교1개, 서원1개, 사우4개, 루정 : 33개-루(8), 정(23), 대(2)-(襄陽의 樓亭臺襄陽文化院 2013년), 기념비 11개, 선정비 28개, 선행비 10개, 신묘,불교,신도비 17개, 효렬비 18개, 항일독립운동비 5개(襄陽地方의 金石文,襄陽文化院,2014년)가 있다. 양양의 유교문화유적은 영동지방 주에서 다양하게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임진왜란과6·25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되고 유실되었지만 기록을 토대로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3) 『新增東國輿地勝覽』
본래 고구려 翼峴縣인데(伊文縣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翼嶺이라 고쳐서 守城郡의 屬縣이 되었다. 고려 顯宗 때 縣令을 두었다.高宗8년(1221)에 거란군사를 방어한 공이 있다고 하여 읍호를 襄州로 하고 防禦使를 파견하였으나 고종 44년 적에게 항복하여 德寧으로 읍호를 바꾸고 강등하여 監務를 두었다가 元宗원년(1267)에 다시 양주로 회복하고 知襄州事를 파견하였다.본조 太祖6년(1397)에 임금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府로 하였으며 太宗13년(1413)에 예에 따라 都護府로 하였고, 태종16년(1416)에 지금의 명칭인 襄陽으로 고쳤다.
4)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Ⅱ, 715쪽
5) 양양군의 역사와 유적, 1994.
6)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Ⅱ, 712쪽
  昨日 강릉시장에서 八,九名 舊韓國旗를 持하며 獨立萬才를 高唱하니 二十여명 화창 하였으면 他群衆은 참가하지 않고 解散 主謀者取調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