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9월 - 양양 3·1만세운동과 현북면 만세운동(기사문리 만세운동)

페이지 정보

조회 936회 작성일 2020-02-05 17:53

본문

9월 - 양양 3·1만세운동과 현북면 만세운동(기사문리 만세운동)



1919년 4월 9일은 양양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엿새째로, 현북면 기사문리(其士門里) 관 고개(만세운동 이후 만세고개라 부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만세운동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현북면 만세운동 계획은 양양 장날인 4월 9일 양양 장마당에 가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였는데, 4월 6일 원일전리 박원병이 등사하려고 소지한 독립선언서가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면서 일이 처음부터 꼬였다.
그러자 그의 형 박규병은 장리 훈장인 이성윤과 함께 원일전리 주민 40여 명이 모인 가마터에서 이 사실을 알리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7일 박규병이 원일전리, 장리, 도리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양양경찰서에 구속된 박원병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일경의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면민대회와같은분위기로만세운동을시작하다



(65).jpg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고개>


현북면 만세운동은 상광정리 오세옥과 이응렬이 광정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주동이 되었고, 도리 김재한, 오익환, 박원병, 오정현 등 한학자들은 각 마을 구장들과  합세하여  극비리에 추진하였다.
9일 아침이 되자, 상광정리 김종대는 며칠 동안 만든 태극기 34개와 대형 태극기 1개를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대치리(大峙里) 구장 김종성(金鍾聲)을 비롯한 각 마을 구장들이 앞장을 서서 현북면 사무소로 갔다. 군중이 모이자 먼저 도착한 말곡리 문종석,  김익열,  김창환, 권광식, 김종성, 한윤성, 이희원, 오정현, 김우근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농촌에서는 한창 바쁜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주먹밥을 싸가지고 집집마다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씩 나왔으며, 인근 마을에서는 아이들도 만세 소리를 듣고 구경하러 거리로 몰려나왔다.
대략 1천여 명의 군중이 신작로까지 가득 메운 가운데 명지리 윤명종과 황선극의 선창으로“대한 독립 만세!”를 연창하니 군중 모두가 따라 외쳤다. 이 광경은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운동이라기 보다 마치 면민대회와 같은 자유롭고 단결된 분위기였다.


(66).jpg


<3.1절 기념행사>



기사문주재소로방향을바꾸다


현북면 사무소 주변에서 한창 격양된 분위기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양양으로 가려고 할 때, 평소 지역에서 신망이 높은 김익제(金翼濟)가 찾아와 군중을 저지 시켰다. 그가 양양에서 이곳으로 급히 온 이유는 지금 양양에는 일본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몰려간다면 인명 피해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이를 만류하러 왔다고 하였다.


(67).jpg


<기사문리 마을 벽화>



이렇게 되자 부득이 계획을 바꾸어 기사문 주재소 앞에 가서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하광정리에서 기사문 주재소 사이에 나지막한 관 고개(현 만세고개)를 만세 군중과 함께 구경나온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줄을 서서 노래도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이미 기사문 주재소에도 만세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강릉 수비대가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만세 군중이 주재소 전방 다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주재소 순사 이홍근이 나와 선두를 막았다. 한참 동안 군중과 옥신각신하였는데, 이를 무시한 하광정리 구장 김진혁의 선창으로 만세를 크게 외쳤다. 곧이어 군중이 에 섰던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온통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와 적막이 한참 동안 감돌았다.
잠시 후 사방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군중들은 흩어졌다.





<당시 상황을 4월 10일 오전 10시에 강원도장관이 보고한 전화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야소교도(襄陽郡縣北面下光丁里耶蘇敎徒)를 중심(中心)으로 한 600명 4월 9일 오전10시(限600名四月九日午前10時) 지개 봉(棒)을 휴(携)하고 만세(萬歲)를 고창(高唱)하면서 기사문경찰관주재소(其士門警察官駐在所)를 습(襲)하여 폭행(暴行)하다 때마침 강릉수비대(江陵守備隊)로부터 래(來)한 보병 5명(步兵五名)과 공력(共力)하여 발포진압(發砲鎭壓)에 노역 폭민사자 9명(努力暴民死者九名) 을 출(出)함 외(外)에 부상자 약간(負傷者若干) 있는 모양(模樣)이나 불명(不明)”



전국에서 가장 극열하게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기록되다


이렇게 현장에서 9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당시의 피살자는 전원거(全元擧,하광정리), 임병익(林秉翼,중광정리), 홍필삼(洪必三,어
성전리), 김석희(金錫熙,어성전리), 고대선(高大先,어성전리), 황응상(黃應想,어성전리), 문종상[文鍾祥,말곡리:2018년 11월 문종희(文鍾熙)로 조사됨], 진원팔(陣元八,어성전
리), 이학봉(李學奉,명지리) 등 9명이다.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위 사망자 중 문종상(1912년생)은 당시 8세로 만세운동에 구경나간 어린아이였으며, 1979년 3월 7일 양양읍 구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형 문종희(文鍾熙·1902년생)는 당시 18세로 만세고개에서 일경이 발포한 총상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남평 문씨 족보에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기록상 문종상은 문종희의 오류임을 밝히고자, 2018년 11월 국가보훈처에 문종희를 독립유공자로 신청을 하였다. 또한 1923년12월1일자‘개벽42호’에는 사망자 총10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앞으로 사실 조사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이와같이 양양 3·1만세운동은 1919년 4월4일부터 9일까지 6일간, 매일 매일 6개 면 82개 마을에서 남녀노소 연인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총 12명의 사망자와 43명의 부상자, 체포 142명 중 69명이 실형을 받았고, 후일 일제는 참가자 명부를 작성해 놓고 수없이 많은 주민을 체포하여 태형을 가하였다.
이에 전국 지방에서는 가장 조직적이며 비폭력적으로 일어났지만, 무고한 희생자가 많았던 기미만세운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68).jpg


<만세운동 재현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