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6월 - 양양의 3·1만세운동, 4월 6일 상평리 김학구 장례 만세운동

페이지 정보

조회 1,058회 작성일 2020-02-05 18:32

본문

6월 - 양양의 3·1만세운동
4월 6일 상평리 김학구 장례 만세운동



(52).jpg


<만세운동 재현행사>



1919년 4월 6일은 양양 3·1만세운동 제3일 째 일어난 날로, 양양면·손양면·강현면·도천면·서면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중 서면 상평리 김학구(金學九)의 장례 만세운동은 전국 기미만세운동 중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만세운동이었다.
첫 번째는 손양면, 강현면, 도천면의 군중이 양양면에서 와서 만세를 불렀고, 두 번째는 양양면 양양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 학생들이 경찰서 뒤 언덕에 올라가 만세를 불러, 어린 학생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세 번째는 4일 장날 경찰서 마당에서 일경의 총탄에 숨진 서면 상평리 김학구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이었다.



손양면·강현면·도천면군중이양양으로들어오다


손양면은 상왕도리 구장 김종택(金鍾澤), 주리 구장 최한두(崔漢斗), 우암리 구장 김진렬(金振烈)이 주동이 되었다. '대한독립지기(大韓獨立之旗)'라고 쓴 깃발과,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농기를 들고 농악대까지 대동하고 남대천 다리에서 저지하던 일본 수비대를 뚫고 양양장터로 들어왔다.
또한 강현면과 도천면의 군중들은 5일 대포주제소에서 일본 경찰이 물러가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6일은 아침 일찍부터 삼베주머니에 도시락을 싸서 망태에 넣고 15km 이상 되는 양양까지 만세를 부르며 걸어서 들어왔다. 어제는 대포주재소에서 일본 경찰 가족들이 이미 배를 타고 피신해 있는 것을 직접 보았기때문에, 만세를 부르면 정말 독립이 될 것같아서 바쁜 농사일을 모두 미루고 양양으로 온 것이다.


01.jpg


<만세운동 재연행사>



그러나 오늘 양양면의 사정은 달랐다. 점점 거세져 가는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소대 군 병력이 양양군에 주둔하였다. 이재훈과 김원식이 앞장선 군중들이 양양면 연창리에 이르렀을 때가 오후 1시경이었는데, 수비대는 새끼줄로 길을 막고 통과를 막았다. 한참 동안을 옥신각신 대치하다가 새끼줄을 끊어버리고 만세를 부르며 양양장터로 의기양양하게 들어왔다.
이미 들어온 손양면 300여 명의 군중과 강현면과 도천면 만세군중이 합세하여 경찰서장과 군수는“양양에서 떠나라”고 요구했고, 만세군중은‘대한 독립 만세’를 계속 외쳤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만세군중에게‘일본 사람은 돌아 갈 테니 군중도 돌아가라’고 허리를 굽혀 간유(懇諭·정성을 다하여 회유)하며 빌었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의 물러가겠다는 설명을 듣고 만세 군중은 오후 늦게 모두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얼마 후에 만세운동 가담자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피신한다고해도 그들의 가족을 괴롭혔고, 또 한창 못자리철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수하여 태형을 받고 농사를 지어야 했다.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인, 이정렬, 이재환 등은 자수하여 60대(2개월의 자유형)의 태형을 받았고, 정암리 김사만도 태형 180대를 나누어 받았다.


(53).jpg


<옛 양양 전경>



양양보통학교학생들이만세운동에참여하다


이날 경찰서 뒤 군행리 언덕에서 양양보통학교 학생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학교 휴교령이 내려지자 4학년 졸업반 김억준(金億俊), 이창식(李昌植) 외 1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억준 학생은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까지 끌려갔다가 나이가 어려서 풀려 나왔지만, 이렇게 양양 3·1만세운동은 남녀노소 어린 학생들도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의지가 대단하였다고 볼 수 있다.


(55).jpg


<장례행렬>



서면 상평리 김학구의 장례 행렬 만세운동이 일어나다


지난 4일 양양 장날 경찰서 만세운동에서 총살당한 김학구는 원래 강현면 침교리 사람이었는데, 서면 상평리 권성심에게 데릴사위로 와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장날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함홍기, 권병연은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숨졌고, 김학구는 경찰이 발포한 총탄에 경찰서 마당에서 숨졌다. 일본 경찰은 유혈이 낭자한 시신을 경찰서 뒷마당에 옮겨놓자, 서면 책임자 노용수가“끌고 가자”라고 소리치자 이형우가 업어 자기 집 뒷마루 밑에 멍석으로 덮어 안치했다. 다음날 가족이 찾아가 장례를 치렀는데 전국 기미독립만세 중 유래가 없는 특이한 만세운동으로, 나라를 잃은 민족의 눈물 속에 치러진 장례 만세 사건이었다.
장례식은 3일장으로 치렀는데 통곡의 행렬이었다. 상평리 마을 사람들은 상여를 메고 서면사무소로 갔는데, 이미 상여가 도착하기 전에 격분한 주민 100여 명이 먼저와 만세를 부르면서 면사무소를 습격하자 면장과 면 직원들은 도망쳐 버렸고 면사무소는 텅 비었다. 만세운동은 바쁜 농사철에 일어났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참여하여‘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고, 상여를 맨 사람들은 상엿소리로 원통한 영혼을 위로하다가 다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상여는 면사무소를 떠나 외진 산길을 따라 30여리 되는 그의 고향 침교리로 상엿소리와 만세를 부르며 강현면 물갑리 고개에 이르렀다. 이때 강현면 침교리에서도 상여를 메고 이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양 마을 사람들은 통곡을 하며 관(棺)을 서면 상여에서 강현면 상여로 옮겼다. 마침 양양면 만세 현장으로 가던 강현면과 도천면의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함께‘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통곡하니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후일 중도문리 이종인의 증언에 의하면“어느 동기가 죽은들 그렇게 눈물이 나겠습니까?”라며 눈시울을 적시며, 이렇게 침교리로 와서 장례를 지냈는데 일본 경찰은 여기까지 찾아와 사설묘지에 묘를 썼다고 하여 다시 파내어 공동묘지로 옮겼다고 한다.”또한 서면 구룡령 넘어 조개리 지석화(池石化)는 장례식 군중이 먹을 음식 100여 명분을 준비하여 걸어서 상평리로 왔다가 경찰에 결국 체포되었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다음날 다시 면사무소 앞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4월 11일자 강원도장관의 보고를 보면“사흘 동안 면사무가 중지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56).jpg


<농자천하지대본 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