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5월 - 물치(沕淄) 장날 만세운동(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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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3회 작성일 2020-02-0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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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물치(沕淄) 장날 만세운동(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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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면 전경>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양양에도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설초 이석범(雪樵·李錫範) 선생은 유림 10여 명과 함께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2월 말 한성(서울)으로 떠났다. 한성은 거리마다 온통 전국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곡소리가 연일 북새통이었다.
그리고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3월20일 귀향하였다. 당시 이석범 선생은 한일병합이 되자 대한제국 중추원의관의 벼슬이 버리고 도천면 중도문리에서 쌍천서숙을 건립하여 후배 양성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누구보다도 독립에 대한 여망이 컸다. 도착 하자마자 동생 이국범과 아들 이재훈(이명·능렬)을 불러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을 맡기고, 본인은 태어난 양양면 임천리 함평 이씨 문중 이교완 집에 머물면서 4월 4일 양양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사람들을 모았다.
양양 3·1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가장비폭력적이며조직적인만세운동을하라!


이석범 선생이 임천리에서 장날을 하루 앞둔 3일 밤, 이교정, 이건충 등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던 중 군수 이동혁에게 발각되어 마을주민 22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되자 동생 이국범과 아들 이재훈은 긴장했고 서둘렀다. 급기야 강현면과 도천면의 유교세력, 쌍천학교의 졸업생, 물치리 감리교회 청년세력 그리고 각 마을 구장들과 연합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일제가 1914년에 강현면은 원래의 강선면과 사현면을 통합하여 면사무소는 장산리에, 도천면은 소천면과 도문면을 통합하여 면사무소를 대포 항구 내에 두었다. 강현면 책임자로 장세환, 김두영, 양익환, 김철기 등으로 정하였고, 도천면 책임자로는 김경영, 이종국, 박사집, 이종순 등을 신속히 정했다.
이석범 선생이 구속된 가운데 4일 양양 장날 만세운동은 예상 밖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날 아들 이재훈은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황의 집에서 친목계를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오늘 양양 장날에서 일어난 만세소식과 내일 물치 장날의 계획을 서둘러 짰다. 그리고 태극기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중도문리 마을 언덕위에 있는, 당시 세도가 컷 던 전주 이씨 종갓집인 이종국의 집에서 흰 옥양목으로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고 만세군중이 많이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리고 폭력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날 경우 일제에 또 다른 빌미를 줄수 있기 때문에 가장 비폭력적이며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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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재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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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천서숙(1913년)>



드디어4월5일물치장날만세운동을일으키다.


드디어 4월 5일 물치 장날이 밝았다. 이날이 양양 3·1만세운동 둘째 날로 이어가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전날 모임에서 강현면 만세군중은 물치 장터에 모여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고, 도천면 만세군중은 대포리에 있는 경찰주재소로 가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 당시 양양은 서쪽으로 험준한 태백산맥에 막혀 한성으로 가는 육로는 왕래가 어려웠고, 대포 항에서 배로 원산항을 거쳐 개성과 한성으로 갔으며, 또한 대포 항은 영동에서 영서로 잇는 물류 항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당시 도천면 면사무소와 대포금융조합 그리고 일본 경찰주재소가 모두 있었다. 이에 옆 마을인 물치리는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그래서 양양 장 다음날인 매 5일과 10일 자로 정해진 물치 장은 양양 장 만큼 큰 장이 섰다.
물치장터에는 아침 일찍부터 강현면 일부 만세군중이 물치 장터로 가다가 도중에 강현면 장산리에 있는 면사무소에 들렸는데, 면장과 직원들은 모두 도망가고 남아있던 서기 김남훈은 만세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 도천면에서 온 군중들과 합세하였다. 김두영, 박제범, 김대선이 옥양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선두에 섰으며, 면민들은 작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물치 장터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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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면 대포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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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포항>



한편 이국범이 인솔한 중도문리 주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나무내 고개(세칭:만세고개)를 넘으면서 만세를 부르고 그 행렬은 장장 6km가 넘는 길을 걸어 계속 만세를 부르면서 물치 장터에서 강현 면민과 합세했다. 물치 장터 쌀가게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세워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본인은 돌아갈 가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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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보통학교(1919년 4월 1일 개교>



만세를불러일본경찰주재소를완전굴복시키다!


강현면 만세군중은 오전 11시경, 모두 물치 장터에 모여서‘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오후에는 하복리에 사는 이철우가 대형 태극기를 앞에서 높이 들고, 회룡리의 박봉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 높여 외치며 대포리에 있는 일본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였다. 대포 항에 도착하니 이미 도천면의 군중들이 벌써 와 있었는데 그 수는 1천여 명이 넘었다.
두 면민이 모여 부른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 흔드는 것 같았고 기세가 당당했다. 그리고 일본 경찰주재소 앞에서 모두 한 목소리로“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연신 외쳐댔다. 이미 겁에 질린 일본 경찰들은 일본인 가족들을 아침 일찍 배에 태워 바다로 피신 시켰고, 일부 직원들만 남아있었다. 겁을 먹은 일본 경찰주재소 수석(首席)은 만세 군중들 앞에 나와“우리는 돌아 갈 테니 제발 조용히 만세만 부르고”돌아가 달라고 간청했다. 날이 점점 저물어지자 만세 군중은 이제 독립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내일 양양에 가서 다시 만세를 부를 것을 약속하고 질서 있게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3·1만세운동 직전인 1919년 4월 1일 개교한 대포초등학교는 지금도 대포 항 언덕 위 그 자리에서 올해로 100년 째, 그날의 만세 함성이 이 항구의 물결을 일렁거리게 한 대포항을 내려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