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4월 - 양양장날 만세운동과 함홍기 열사(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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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46회 작성일 2020-02-0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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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양양장날 만세운동과 함홍기 열사(4월 4일)



1919년 4월 4일은 이석범(李錫範) 선생과 조화벽(趙和壁)지사가 몰래 가져온 독립선언서가 단초가 되어, 독립을 염원하는 지역 유림, 양양보통학교 동문, 양양감리교인 그리고 농민이 연합하여 양양면 남문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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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홍기, 권병연 추모비>



양양장날만세운동이시작되다


장날을 하루 앞둔 3일 밤, 양양면 임천리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던 중 일부가 발각되어, 이석범선생을 비롯한 마을 책임자 22명이 체포되고 태극기가 압수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각 마을과 감리교회 책임자들의 철저한 준비가 있었으므로 장날 만세운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일본 경찰은 4일 장을 철시하고 사전에 경계태세를 강화하였지만, 장으로 들어오는 다섯 개 통로로 각 마을 만세 군중은 베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왔으며, 일부 장꾼들은 두루마기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동면 송현리 등 만세 군중이 먼저 들어와 시장과 경찰서가 내려다보이는 구교리 뒷산에 모여, 최인식과 김필선 등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신호탄을 울렸다. 동쪽에서는 조산리와 사천리 군중이 청곡리 군중과 합세하여 들어오다가 연창리 대미소(현 터미널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였으나 계속 밀고 들어왔고, 남쪽에서는 함홍기 구장이 인솔하는 가평리와 손양면 군중이 함께 남대천 동운교(현 산림조합 옆) 앞에서 일경과 충돌하였고 또한 서면 상평리와 북평리도 박춘실과 노용수가 선두에 섰고, 용천리 군중은 노병례, 최선극이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들어왔으며, 임천리는 김명기와 최항식이 앞장섰고, 거마리는 김종태가 선두에서 태극기를 펄럭이며 만세운동에 참여를 독려하면서 들어왔으며, 감곡리 군중은 북문을 통해 이관진, 이원도, 이원희 3부자가 앞장서 들어오다가 체포되었으나 계속하여 밀고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미 장을 보러 나온 장꾼들도 합세하여 11시 경에는 4천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울분에 찬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수여리 고 이준재(이종우 선생의 부친) 옹의 증언에 의하면“농사철이라 많은 사람들이 논에서 일을 하는데 만세소리가 20여 리 떨어진 수여리까지 들려서 삽과 괭이를 버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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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양양시장>



일경의 칼에 양팔이 잘리며 항거한 함홍기열사


만세 군중은 오후가 되자 경찰서 마당에 모여, 전날 임천리에서 체포한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咸鴻基:당시 24세)는 경찰서장 실로 뛰어 들어가 항의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서장에게 화로(火爐)를 집어던지려 할 때 옆에 있던 사법 주임이 칼로 팔을 내리치고 허리를 찔렀다. 팔을 잃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서도 계속 항거하다가 끝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어서 손양면 간리의 권병연(權炳淵:당시 26세)도 항의하자 일본도에 목을 맞아 쓰러졌고, 밖에서는 격분한 군중들의 함성이 높아지면서 서면 상평리의 김학구(金鶴九)도 울분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항의하다 일경이 연발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때 가평리의 신영묵, 북평리의 용조원과 이흥달은 턱뼈가 부러지는 등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으며 세 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전국 3,1운동사에 양양의 함홍기 열사처럼 일경에 팔이 잘려나가면서도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예는 없으며, 그 후 양양의 3.1만세운동은 4월 9일까지 일주일 간 질서있게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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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군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