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1월 - 양양의 3·1만세운동(이석범과 임천리)

페이지 정보

조회 1,291회 작성일 2020-02-06 12:20

본문

1월 - 양양의 3·1만세운동(이석범과 임천리)



2019년은기미만세운동100주년이되는해이다.



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에 일어난 양양3·1만세운동은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해로, 양양문화원 부설향토사연구소에서는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당시의 3·1만세운동에 관련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양양지방의 3·1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의 입수가 단초가 되었는데, 하나는 유학자인 설초 이석범(雪樵李錫範) 선생에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양양 감리교회 조영순 전도사의 외동딸인 조화벽(趙和壁:개성 호스돈여학교 재학) 성도가 버선목에 숨겨 대포항으로 들어왔다.
이석범 선생은 당시 도천면 중도문리(현재 속초시)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 만세운동은 동생인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李載勳·能烈)에게 앞장세우고, 도천면은 중도문리의 김영경, 이종국을, 강현면은 적은리의 장세환 등을 책임자로 맡기고, 본인은 고향인 함평이씨(咸平李氏) 집성촌인 임천리(林泉里)에 머물면서 양양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29).jpg


<이석범>



쌍천서숙(학교)을설립하여후진양성에힘쓰다.


이석범 선생은 조선조 1545년 양양부사를 지낸 이춘령(李春齡)의 10대 손이며, 또한 1808년 부임한 양양부사 이광식(李光植·初名英植) (현산공원 부사 석조비 23위 중 유일한 불망 양각철비)의 후손이다. 1859년 양양면 임천리 14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 25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1899년에는 중추원 의관을 거쳐 1905년 군부주사 겸 군기창기수에 임명되어 국정 심의에 참여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잔악무도한 병합통치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1913년 도천면 중도문리에 쌍천서숙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과 항일 애국정신 함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19년 1월 21일에 고종 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종만(李種萬)을 위시한 유림 20여 명이 2월 20일 밤 현산공원에 모여 망곡단을 설치하고 한성 쪽을 향하여 망곡제(望哭祭)를 올리며, 고종의 인산(因山)에 이석범 선생과 향리 10여명이 참례하기로 결정하였다.


(30).jpg


<쌍천서숙(도문면 중도문리)>



양양3·1만세운동은임천리에서시작되었다.


이석범 선생은 고종의 인산에 참례 후 독립선언서를 3월 말 몰래 숨겨와 임천리에서 머물면서 4월 4일 양양 장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니까 사실상 양양 3·1만세운동의 진원지가 임천리라 할 수 있다.
사업가로 신망이 높은 이 마을의 최인식(崔寅植:양양보통학교 1회)은 양양보통학교 출신의 각 마을 구장들과, 양양 감리교회 청년부의 김필선(金弼善), 김계호(金啓鎬)와 독립을 열망하는 지역 유림 등과 규합하였다.

그리고 문중인 이교완(李敎完), 이교정, 이건충 등 몇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몰래 만들던 중 4월 3일 밤 군수 이동혁과 군속 심운택이 급습하여, 이석범 선생과 마을 주민 22명이 체포되고 태극기 374매가 압수되는 사태가 발생한 마을이다.
그러나 다음 날인 4일 양양 장날에는 각 마을마다 계획대로 수천여 명이 장꾼을 가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본 경찰에 항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만세운동은 6개면 82개 동리의 남녀노소 6,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4월 9일까지 6일 동안 계속되어, 13명의 사망자와 7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구금 또는 수형자만도 172명 그리고 수없는 사람이 태형을 받아 전국 지방에서는 가장 극열하게 일어난 기미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31).jpg


<임천리 전경>


(32).jpg

<3.1운동기념비(양양읍 현산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