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양양의 선사문화 / 이철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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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16회 작성일 2020-02-0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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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교육]


양양의 선사문화


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이철수 소장



1. 자연적 배경


영동지방 중북부에 위치하는 양양지역은 동쪽은 동해, 서쪽은 태백산맥이 가로막혀 있다. 오대산 두류봉이 발원지인 남대천은 현북면 법수치리와 어성전리를 지나 양양의 중심부를 흘러 동해로 유입되고, 응복산과 오색령,설악산 등지에서 발원한 계류들을 합류한 후천이 임천리에서 합류 남대천으로 흘러간다.
해안에는 파도에 의한 지표의 변환에 백사장이 발달해 있으며 해안선 부근에는 동해 사면의 하천으로부터 유수를 받아들여 다시 동해로 배수하는 지정학적으로 석호(潟湖)로 불리는 호수가 형성되어 특수한 경관을 이루고 있는데 양양 오산리의 쌍호와 현남면 포매리의 매호가 대표적이다.
기후는 태백산맥이 북서 계절풍을 막아주고 동해에 난류가 흘러 같은 위도상의 내륙이나 서해안 지역보다 기후가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13℃ 내외이 1월 평균기온 0.7℃, 8월 평균기온 24℃ 이다. 연평균 강우량 1,300mm 정도이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을 갖고 있어 신석기 시대에는 고온 다습한 기후에서 건조한 기후로 변했고, 청동기 시대에는 다시 고온다습한 기후로 변했다. 철기 시대에 접어 들어서면서 건조한 기후로 환원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기후변동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주거 입지조건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2. 문화 환경적 배경


양양지방은 지형상으로 동해안의 해안선을 동북 및 동남지방과 연결되고 중부지방과는 태백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으나 태백산맥의 곳곳에 있는 구룡령,오색령,미시령 등을 통하여 영서지방과 연결된다. 양양지방의 선사문화는 이러한 역사적 지형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북방계 선사문화와 밀접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은데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동북계 문화가 유입되었음이 고고 자료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 조사된 선사유적들의 분포 입지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선사유적들은 주로 동해바다와 인접한 하천이나 호수 주변의 사구지대와 낮은 구릉지대에 주로 해안단구의 평탄면에서 주로 발견되며 또한 주요 하천변의 낮은 구릉성 단구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렇듯 영동지방에서 발견되는 선사유적들의 자연적 입지조건은 시기마다 대체로 일정한 규칙성을 보이고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주된 생업은 어로(漁撈)이고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된 생업은 농경(農耕)이었기 때문에 주거의 입지조건을 달리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이와 같이 선사문화의 환경적 배경에서 볼 때 양양지역의 선사시대의 각 문화상은 영동지방의 다른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주민의 정착


1984년 손양면 도화리 일대에서 전기 구석기에 속하는 주먹 토기와 1,000여점의 땐석기가 출토되어 양양지역은 구석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 동해안 지역 곳곳에서 다수의 구석기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땐 석기가 출토되는 구석기 유적들은 주로 동해안에 접한 해안단구나 주요 하천변의 구릉에서 발견되고 있는 입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구석기인들의 주요 생활터전이 해안단구나 하천변의 구릉 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주민들은 주로 식량자원이 풍부한 큰 강가 또는 하천변의 대지나 해안가의 모래언덕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여 정착생활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1981년~1987년 오산리 유적, 1994년~1996년 가평리 유적, 1995년 지경리 유적, 2002년 용호리 유적, 2006년 송전리 유적, 2006년~2007년 오산리 유적 등 일련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신석기 주민들이 이곳을 활동무대로 삼아 삶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영동지방의 자연. 지리적 환경과 동일한 양상을 띠는 남대천, 동명천, 화상천 등 주요 하천 유역 및 석호주변의 사구지대를 중심으로 신석기 주민들이 어로와 원시적인 농경을 하며 정착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구석기인의 혈통이 신석기 시대까지 계승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다양하게 적용한 구석기인일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도 신석기를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았음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일정한 규모의 세력집단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양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 유적들은 지금까지 영동지방에서 발견 조사된 유적의 입지 조건과 매우 부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주요 하천변의 낮은 구릉지대에 주로 입지(立地)하고 있다.



4. 한국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양양 오산리 유적


오산리 유적은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일원 동쪽 바닷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1981년~1987년 동안 6차례의 발굴 결과 14기의 움집터와 함께 다양한 석기, 토기 등 4,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연대측정 등 연구·분석 결과 약8천년을 전후하는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밝혀졌으며, 1997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오산리 유적과 영동지방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 유물 등이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5. 오산리 신석기 사람들의 생활 모습


1) 토기 제작
오산리 신석기사람들은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토기는 겉면에 무늬를 덧붙인 덧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무늬를 새긴 누른 무늬 토기, 빗살무늬토기,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 등 다양한 모양과 형태를 보여준다.


2) 어로 생활
오산리 신석기사람들은 바다나 하천, 호수 등에서 물고기 등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고기잡이 유물은 주로 석기인데 낚시 도구(이음낚시), 작살 촉, 그물추 등이 다량 발굴되었고, 배 또는 노의 일부로 추정 되는 목재유물과 배 모양의 토기 등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3) 수렵 생활
유적 주변에서 크기가 다양한 화살촉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산리 신석기 사람들은 식량과 모피류를 얻기 위해 육지 동물을 사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채집 생활
오산리 신석기사람들은 나무나 식물의 뿌리, 과일, 도토리 등 열매를 채집하여 식량을 확보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돌칼, 돌도끼 등과 열매나 곡물을 갈 때 사용하는 갈돌과 갈판 등의 도구가 발굴되었다.



6. 오산리 유적 출토유물


1) 토제인면상(土製人面像)
사람 얼굴 모양을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기 신상(神像)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2) 토기류
오산리 유적에서는 서해안 지역을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와 동북지방의 납작밑바리 및 남해안 지역의 덧무늬토기, 두 귀 달린 항아리 등 각 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고루 출토되었다.


3) 흑요석(黑曜石)
화산폭발로 생성된 암석. 깨뜨리면 날카로운 날이 생기기 때문에 석기의 중요한 재료로 쓰인다. 원산지가 백두산 지역으로 밝혀져 이 지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4) 뗀석기(打製石器)
직접 돌을 깨서 생기는 예리한 날이나 뽀족한 부분을 사용하는 생활도구로 구석기사람과 신석기사람들에게 중요한 도구였다.


5) 간석기(磨製石器)
돌의 날 부분 또는 표면 전체를“갈아”만든 도구로 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다.


6) 돌톱
길이 18㎝ 크기에 23개의 톱니로 이루어졌다. 대형 돌톱이 출토된 것은 국내외적으로 그 예를 찾기 어려운 경우이다.


7) 오산리형 이음낚시
낚싯바늘의 허리부분은 돌을 갈아 만들고 미늘 부분은 동물의 뼈를 섬세하게 갈아 끈으로 묶어 낚싯바늘을 완성하였다. 학계에서는 오산리형 이음낚시라 부르고 있다.


8) 갈돌·갈판
갈돌과 갈판은 한 조를 이루며, 나무 열매나 곡물 껍질을 벗기거나 갈아서 가루를 만드는 가공 도구이다.
돌로 만들어진 갈판 위에 갈돌을 이용해 상하 또는 좌우로 움직여서 식량 재료를 얻는 원시적인 방아 연장으로 맷돌이라고 할 수 있다.


9)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그릇의 표면에 점토띠를 덧붙여 여러 가지 문양 효과를 나타낸 것으로 다양한 덧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10) 곰모양 토우
곰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크기는 길이 5.5㎝, 너비 2.3㎝, 높이 2.2㎝로 작다. 곰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신앙과 연결되어 신석기시대 동물의례와 관련된 유물로 여겨지기도한다.


11) 배모양 토기(舟形土器)
점토를손으로빚어내부공간을비우게하였으며, 바닥은편평하게처리하여배모양과비슷하게만들었다.



7.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의 또다른 즐거움


1) 쌍호(雙湖)
오산리 신석기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던 쌍호는 사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이한다. 쌍호 안에는 움직이는 갈대 군락지가 있어 바람의 영향으로 이동하여“움직이는 갈대숲”이라고도 부른다.


2) 탐방로
쌍호와 유적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두갈래의 탐방로는 자연을 벗삼아 신석기사람들의 발자취를 느낄수 있는 체험장소이다.


3) 움집
오산리 유적을 6차례 발굴한 결과 14기의 움집터가 발견되었다. 바닥에 약5㎝정도 두께의 진흙을 깔고 불로 다진 후 기둥을 세워 갈대 등으로 지붕을 이어 덮었다. 움집 내부에는 1~2개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불을 피웠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