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양양의 문화유적 진전사(陣田寺)와 삼층석탑 / 이철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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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59회 작성일 2020-02-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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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교육]



양양의 문화유적 진전사(陣田寺)와 삼층석탑


양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이철수 소장



▶ 장소 :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5번지.(물치에서서쪽7km)
▶ 문화재 : 강원도 기념물 52호. 국보 제 122호. 보물 제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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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계종의 宗刹陣田寺(종찰 진전사)


우리나라 선종(조계종)의 종조인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821년)에 주석(駐錫)한 사찰이며,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의 개산조인 도의선사가 82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주석했던 곳으로 그 뒤를 이어 염거화상, 보조국사와 같은 고승들이 이어갔고 선종을 받아들인 최초의 사찰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선사가 구족계를 받은 사찰이다.(고려 21대 희종 2년(1206년 6월생으로 9세때 무량사에 입문, 공부하였고 14세때 진전사로 옴) 도의선사의 선법과 사상은 중국 당나라에서 西堂(서당)에게서 37년간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그때 경주일원에는 敎學(교학)사상이 크게 융성하였으므로 경주를 떠나 설악산 아래 진전사로 오신 것이라 한다. 도의선사의 법통은 선종의 2대조인 억성사의 염거화상에게 전하고 염거화상은, 3대조는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의 보조선사(체징)에게 전수되어 선종의 법통을 이어갔다. 도의 선사가 당나라로부터 귀국하였던 8세기는 진전사는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고려 때는 선종의 대 도장 가지산문의 근본도장으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세조 12년(1467년)까지 존속하였으나 이후 폐사되어 일제 강점기에 屯田寺(둔전사)로 불리다가 진전(陳田)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면서 陳田寺라는 것이 밝혀졌다.
1965년 3월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사팀이 일대를 답사하고 석탑, 부도 등을 발굴 조사하여 학계에 보고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기울어져 가는 석탑을 해체 하여 바로세우고 흩어져 있던 부도 파편들을 모아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82년 11월 3일 국가 문화재로, 3층석탑은 국보 122호로, 석조부도는 439호로 지정하게 되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부도탑이 있는 상부 영역을 전면 발굴하여 원형대로 남향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법당을 복원하였다.
진전사의 위치는 동쪽을 바라보며 멀리 동해가 굽어보이는 眺望(조망)이 절터 앞을 흐르는 계류와 잘 어우러져 마치 경주 동해안의 감은사터를 연상케 한다.
한국에 전해진 선법은 6조 혜능의 법손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첫 전법자가 道義(도의)이다. 그는 선덕왕 5년(784)에 당으로 가서 마조, 도일의 고제자 서당 지장에게서 법을 얻고 현덕왕 23년(831)에 귀국,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못하고 오히려 魔說(마설)이라고 거부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 그 법을 염거에게 전하니 염거는 체징(804-880)에게 법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9산선문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 三層石塔(국보 제122호)


3층석탑은 신라식 일반형식으로 2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까지 있고 그 이상은 결실되었다. 2층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9세기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1966년 2월 28일 국보 제 12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m의 화강암 3층석탑은 8장의 장대석으로 구성된 후 2중 기단을 올렸는데 하층기단은 낮게 구성하였으며 양족에 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1개로 입면을 구성하고 그 사이 면석에 연꽃 무늬 받침 위에 앉아있는 비천상 2구씩 새겼다.
면석에는 구름위에 앉아있는 팔부신중상 2구씩을 새겼는데 면석의 조각 수법과 하층에 비해 높은 입면을 구성한 전체적인 비례는 9세기 통일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들 천인상은 공히 7엽의 연화좌상에 안좌하고 2중의 원형 단신은 구비하였으며 면천의를 날고 있었는데 수인은 합장을 하거나 천의를 잡고 있는 등 각이한 형태이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고 사우는 유실되었는데 노반에는 직경 10cm, 깊이 10cm의 찰주공이 있어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는 상태다. 낙수홈을 음각하여 세밀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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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석탑 모형>



탑의 높이: 5m.
下基面高(하기면고) : 32.5cm 下基面幅(하기면폭) : 230.5cm
上基面高(상기면고) : 91.5cm 上基面幅(상기면폭) : 178.0cm


塔身部단위 : cm
身高(신고) / 身幅(신폭) / 屋蓋長(옥개장)
제1층 / 79.5 / 90.0 / 154.0
제2층 / 30.5 / 80.5 / 136.5
제3층 / 26.5 / 66.5 / 116.5



3. 진전사지 부도(보물 제439호)


전형적인 부도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진전사지 부도는 사각형 2중기단 위에 팔각형 탑신부를 올린 특이한 형태인데 현존하는 부도 중에서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 1966년 2월 28일 보물 제 439호로 지정되었다.
사각형의 낮은 지대석 위에 2중으로 구성한 4각형 기단을 올렸는데 하층기단 면석 중앙에 탱주가 없고 상하기단의 각 면에 초각이 없는 것이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인 조형은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단위의 탑신은 8각형으로 연꽃문양을 초각한 8각의 탑신굄돌 위에 놓여있고 정면에 문짝 모양을 초각하였을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옥개석 처마는 수평이고 추녀는 안으로 휘어있고 상륜부의 구형 보주를 받치는 옥개석의 상부는 두 겹의 연꽃을 새겼으며 보주 아래 부분에도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8각형 연꽃문양의 탑신굄돌 위쪽 중앙에 크기 26.5cm쪻29cm, 깊이 9.5cm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석조 부도에 연꽃모양의 굄돌을 별개의 돌로 만들어 사리구멍을 만든 예는 드물다. 전체 높이는 2.17m로 부도 앞에 원을 중심으로 8장의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이 놓여있다. 부도탑의 조성연대와 관련하여 진전사의 창건연대와 관련된 도의 선사의 부도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만약 도의선사의 부도로 확인될 경우 우리나라 부도의 시초가 되는 것으로 문화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중앙 당주로 양분하여 한편에 각 2 座式(좌식)의 天人座上(천인좌상)을 양각하였다. 이들 천인상은 공히 7엽의 蓮花座(연화좌) 위에 安座(안좌)하고 2중의 원형 短身光(단신광)을 구비하였으며 天衣(천의)를 날리고 있는데 手印(수인)은 합장하거나 혹은 천의를 잡고 있는 등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조각은 각 천인의 相好(상호)가 원만하고 美麗(미려)하며 천의자락이 잘 어울려 당대의 秀作(수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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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사진 [석탑의 상층기단 신중앙(동편)]>



4. 신라 말기의 선종의 전래


35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까지 활발했던 신라 불교는 그 후 점점 침체되어 갔다. 이 무렵에 직절 간명한 선(禪)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새로운 선풍(禪風)은 중국에서 달마 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독특한 선종(禪宗)으로 성립·발전된 것이다. 중국의 선종이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남북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가 극성할 무렵 신라 학승들이 선법을 배워왔다. 북선(北禪)은 흔적만 남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6조 혜능의 남선(南禪)은 크게 일어나 신라의 선종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한국에 전해진 선법은 6조 혜능의 법손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전법자가 도의(道義)이다. 그는 선덕왕(宣德王) 5년(784)에 당으로 가서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고제자 서당(西堂) 지장(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현덕왕 23년(831)에 귀국,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설(魔說)이라고 거부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니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 804∼880)에게 법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9산선문(九山禪門)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5. 고려 전기의 선종 구산의 완성


고려 태조는 불교를 외호하는 데 있어서 종파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무인적인 성격에서 자연 선종을 좋아하여 선승(禪僧)에게 귀의,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958년에 관리등용을 위해 과거제도를 쓴 데에 견주어, 승려의 위계질서를 가리려고 승과(僧科)를 설치했다. 이것은 승려를 존경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 그들을 통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신라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9산선문은 고려에 와서 이엄(利嚴, 866∼932)의 수미산파의 성립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



6. 고려 중기의 선종의 부진


성종 구산의 성립에 따른 선법의 영향으로 여러 종파의 교학이 빛을 잃은 듯했으나 화엄교학만은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 남북국 시대에 의상이 화엄을 널리 펼친 이래 끊임없이 연구되어 고려에 계승되었다. 화엄 교학은 고려조 전체를 통해 선종이나 교종을 막론하고 널리 연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승보살의 실천적 행동을 강조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자들의 출가가 많았는데,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 1055∼1101)은 문종의 제4왕자로 11세에 출가, 영통사의 왕사 난원(爛圓)에게서 화엄을 배웠다. 그는 송(宋)에도 유학하였으며, 그때 천태학(天台學)을 전수받고 귀국 후에는 천태교관(敎觀)을 널리 강설했다. 그는 또 교장도감을 설치, 국내외의 논저(論著)를 널리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을 출판했다. 고려는 초기부터 선(禪)이 성하였으나 천태교학이 들어온 뒤부터 중기에는 재래의 선종은 심히 부진하게 되었다.



7. 고려 후기의 선종의 중흥과 조계종의 성립


천태교학이 들어온 뒤부터 고려 중기에는 선종은 심히 부진하였다. 이때 고승 지눌(知訥, 1158∼1210)이 나와 조계선종의 중흥을 이루었다. 많은 선승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어 고려불교의 후기는 선종 일색이 되었는데, 지눌은 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8. 선종 구산(禪宗九山)


선종구산은 남북국 시대의 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태조 때 완성된 불교 선종(禪宗)의 구산문(九山門)을 가리킨다.
중국에서 성행한 달마(達摩)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 한국 선종의 종풍(宗風)을 일으킨 아홉 산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지산문·동리산문·봉림산문·사굴산문·사자산문·성주산문·수미산문·실상산문·희양산문이다.
이후 이들 9산문은 선적종(禪寂宗)에 속하게 되며 의천(義天)이 만든 선종 천태종(天台宗)에 대립하였다가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되어 선종 2종파 중의 하나가 되었다.



9. 선종의 9산은 다음과 같다.


① 가지산문(迦智山門)
설악산에서 도의(道義, 825)의 법을 배운 제자 체징(體澄, 804-890)이 837년에 당에 건너갔으나 실망하고 840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쳤다. 이로써 선종 9산의 일파로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되었다.
② 실상산문(實相山門)
홍척(洪陟, 830)이 당의 지장(智藏, 735-814)에게서 배워와 남원의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서 실상산문을 열었다.
③ 희양산문(曦陽山門)
도헌(道憲, 824-882)은 준범(遵範)·혜은(慧隱)의 법맥을 받아와 문경의 봉암사(鳳岩寺)에서 희양산문을 열었다.
④ 봉림산문(鳳林山門)
현욱(玄昱, 787-868)·심희(審希, 9세기) 등에 의해 창원의 봉림사(鳳林寺)에서 봉림산문이 형성되었다.
⑤ 동리산문(桐裡山門)
혜철(惠哲, 785-861)에 의해 곡성의 태안사(泰安寺)에서 동리산문이 형성되었다.
⑥ 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800-888)에 의해 보령의 성주사(聖住寺)에서 성주산문이 형성되었다.
⑦ 사자산문(獅子山門)
도윤(道允, 798-868)·절중(折中)에 의해 영월의 흥령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이 형성되었다.
⑧ 사굴산문(闍崛山門)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사굴산문이 형성되었다. 사굴산문은 도굴산문이라고도 한다. 이로써 신라말에 8산이 형성되었다.
⑨ 수미산문(須彌山門)
이엄(利嚴, 869-936)에 의해 고려초에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서 수미산문이 열려서 9산 선문이 정립되었다.


<참고자료>
※ 둔전 (屯田) : 변경 지역이나 군사 요충지에 주둔한 군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토지이다.
그러한 제도를 둔전이라 한다.



화엄종


화엄경 (華嚴經)을 주요경전으로 삼아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당초 인도에서는 화엄종의 시조는 용수(龍樹)·세친(世親)이었다. 중국에서는 창시자 법장(法藏)이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서 '현수'(賢首: 보살의 이름)라는 법호를 하사받았으므로 현수종이라고도 하고,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을 주장했으므로 법계종이라고도 불린다. 화엄종의 특색은 법계연기론에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理:본체)와 사(事:현상)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며, 사와 사 또한 서로 원융하다고 본다.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융통하고 화해하며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 이 종파의 시조는 두순(杜順:法順이라고도 함)이며 2조는 지엄(智儼), 3조는 법장인데 법장의 저작이 매우 많다. 〈오교장 五敎章〉·〈금사자장 金師子章〉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현장(玄弉)의 교리를 받아들여 교판(敎判)을 완성했으며, 아울러 5대 화엄사찰을 건립하는 등 화엄종의 창립에 큰 역할을 했다. 4대 징관(澄觀)은 '청량국사'(淸凉國師)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 문인인 종밀(宗密)은 선교(禪敎)의 융합을 꾀했으며, 유가 및 여러 사상을 조화시켜 이후의 화엄종풍의 기조를 이루었다. 당 무종(武宗)의 멸불(滅佛) 사건 이후 이 종파는 큰 타격을 입어 쇠퇴했다. 우리나라의 승려의상(義湘)은 지엄에게 화엄을 배운 후, 신라에서 화엄종을 열어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8세기 신라의 승려 심상(審詳)은 일본에 건너가 화엄교리를 강의하고 일본 승려 양변(良辯)에게 법을 전하여 일본의 화엄종을 성립시켰다. 그후 우리나라의 화엄종은 고려초에 교종(敎宗)이 되었다.


교종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함.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한 종지(宗旨).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宗)의 강격(綱格)으로 하고, 좌선으로써 내관자성(內觀自省)하여 자기의 심성(心性)을 철견(徹見)하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함을 종요(宗要)로 하는 종. 선종이란 말은 부처님의 설교(說敎)를 소의(所依)로 삼는 종파를 교종(敎宗)이라 함에 대하여 좌선을 닦는 종지라는 뜻. 당나라 말기로부터 선종·교종의 세력이 대립하게 되며, 교(敎)밖에 선(禪)이 있다는 치우친 소견을 내고 교외별전의 참 뜻을 잃게 되어, 도리어 선종이란 명칭을 배척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됨. 이 종은 석존에게서 정법의 유촉을 받은 가섭으로부터 보리달마까지의 28조가 있고, 제28조인 보리달마가 520년(양의 보통 1) 중국에 와서 혜가에서 법을 전함으로부터 동토의 제5조 흥인에 이르러 그 문하에서 혜능을 제6조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를 제6조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갈리었다. 북종은 오래지 않아 후손이 끊어지고, 혜능의 1류(流)만이 번성하여 5가(家) 7종(宗)을 내었다. 원나라·명나라 때 이르러서는 다른 종파가 다 쇠퇴기에 들어갔으나, 이 종만은 오히려 번성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784년(신라 선덕여왕 5) 당나라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받아 온 도의(道義)를 초조(初祖)로 하는 가지산문(迦智山門)을 비롯하여, 역시 지장의 법을 받은 홍척(洪陟)을 초조로 하는 실상산문(實相山門), 염관 제안(鹽官齊安)에게서 법을 받아 온 범일(梵日)을 초조로 하는 사굴산문(?堀山門), 지장에게서 법을 받은 혜철(惠哲)을 초조로 하는 동리산문(桐裏山門), 마곡 보철(麻谷寶徹)의 법을 받은 무염(無染)을 초조로 하는 성주산문(聖住山門), 남전 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이은 도윤(道允)을 초조로 하는 사자산문(師子山門), 선종 혜은(禪宗慧隱)의 법을 이은 도헌(道憲)을 초조로 하는 희양산문(曦陽山門), 장경 회휘(章敬懷暉)의 법을 이은 현욱(玄昱)을 초조로 하는 봉림산문(鳳林山門)과, 신라 말기에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은 이엄(利嚴)을 초조로 하는 수미산문(須彌山門)의 9산문(山門)이 성립되어 한창 번성했으나, 고려 때에는 차츰 쇠퇴하여지다 고려 명종 때 불일 보조(佛日普照) 국사가 나서 조계산에 수선사(修禪寺)를 세우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설립하여 일으켰으나, 그뒤부터 승행(僧行)이 타락되면서 차차 쇠퇴하기 시작. 고려 말기에 이르러 태고 보우(太古普愚)는 중국 호주 하무산(霞霧山)의 석옥 청공(石屋淸珙)의 법을 받아 왔고, 나옹 혜근(懶翁惠勤)은 강서의 평산 처림(平山處林)의 법을 받아 오므로부터 두 파가 갈리다. 나옹의 법계(法系)는 얼마 안되어 없어지고, 태고의 법계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 현재 조계종에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