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선비전주이씨행장』으로 본 여성의 생활상 / 이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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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20-02-0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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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학교]


제1차 향토문화교육(11월 23일)
『선비전주이씨행장』으로 본 여성의 생활상


강릉원주대학교|이규대 명예교수



서론


조선시대 여성생활사는 특성상 가족제도의 특질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6세기 가족제도의 특질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주목되었으며, 근년에 이르면서 재산·제사·가계상속, 혼·상례 등의 주제에서 개별적인 검증이 이루어지면서 양측적 친족구조에서 부계 친족중심의 가족제도로 이행되는 변화 구조를 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힘입어 여성생활사 연구 또한 이 시기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남편의 재주권(財主權)을 공유하는 부인권(婦人權)의 문제와 양자제도의 초기적 형태로서 주목받는 총부권(家婦權) 변화문제 등 보다 여성사적 시각에서 주제가 확장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입지와 지위문제가 귀납적으로 정리되는 실정에 있다.
한편 조선후기 가족제도의 특질은 16세기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발달되어 심화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시기 여성 생활사는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출산과 육아는 물론 본제가(奉祭祀)·접빈객(接賓客)을 비롯하여 자녀교육·가사노동·가정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개발되면서 여성의 역할과 의미가 규명되어 왔다.
근년의 연구 성과는 보다 다양한 자료가 활용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일기·분재기·호적·행장·문집·족보 등의 자료가 활용되면서 계층별·신분별 양태를 구체적으로 검증하려는 작업이 확산되고 있다. 또한 여성에 대한 규제와 억압에 편중된 시각을 지양하고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린 역동적인 생활상을 주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여성의 역할을 사회경제적 구조와 연계하여 재해석하고 여성 지식인들의 학문적 성과와 그 의식세계가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와 관련하여 몇 가지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가족제도의 특질상 16세기 사회상은 여성생활사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 여기서 16세기 이후 여성의 사회적 입지와 지위의 발전적 의미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과제가 되고 있다. 그 지위와 입지가 보다 열악해 졌다는 인식도 그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대상과 비교 검증이 요구되는 실정이다. 그리고 보다 발전적으로 여성 생활사를 정립하려는 노력도 아직은 여전히 소수의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 성과에 의존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분별·계층별로 폭넓은 검증이 요구되는 실정이다.
여기서는 최근에 강릉지역에서 발굴된『선비전주이씨행장(先●全州李氏行狀)』자료를 이용하여 전주이씨의 생활상을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사회질서 체득과 그 주체적 실천이라는 시각에서 여성생활사의 논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전주이씨는 1751년(영조 27)에 반가에서 태어나서 1822년(순조 22)까지 생존하였으며, 그의 삶은 족보상에서는“여중군자(女中君子)”로 평가되고 있다. “여중군자”를 당대의 바람직한 여성상 내지는 그 지향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전주이씨의 생활상을 재구성하고 그 의미를 규명함으로서 조선후기 여성 생활사의 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 전주이씨의 성장과 혼인


전주이씨는 반가에서 출생하였다. 4조의 경력에서 고조는 사의(司議)로 관직에 나아갔고 증조는 산계(散階)로 정9품 종사랑(從仕郞)을 가졌고, 조부는 진사(進士)에 올랐고 부는 산계로 정5품 통덕랑 품계를 가졌다. 이처럼 전주이씨는 반가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린시절 부친의 사망으로 무남독녀로서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음죽현(陰竹縣) 고작동(古作洞) 외가로 이접하였다. 이로부터 20여 년 동안을 외가댁에서 생활하면서 성장하였다.
1766년(영조 42) 16세에는 보다 외가댁의 형편에 따라 강릉 향호리(香湖里)로 이주하였다. 양자로 영입된 외삼촌이 초계정씨(草溪鄭氏)와 혼인하여 부인의 고향인 강릉 향호리로 이주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렇듯 전주이씨의 성장기 생활환경은 보다 외가의 생활형편에 따라 규정되고 있으며, 이로서 그의 성장환경은 부계 친족구조의 연망으로부터 이탈되어 있었다는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생활환경은 이씨의 혼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당시의 결혼적령기 보다 늦은 22세에 18세 연상이면서 산계로 통덕랑 품계를 갖은 강릉최씨 최창익(崔昌翼)(1733~1789)의 계실(繼室)로 혼인하였다. 이 사실은 생활환경과 부친의 산계가 이씨의 혼인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혼인에는 단아하고 정숙했던 이씨의 성품이 일차적인 변수였을 테지만, 이에 못지않게 생활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친족집단의 질서와 단혼직계의 생활상태


남편 강릉최씨 일족은 증조 때 양양으로 이주한 이래 3대에 걸쳐 문과에 등제하는 등 중앙관직에 출사한 자손을 배출하였고, 한편으로 향리에서 동족마을을 이루어 친족·문중적 조직과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회적 입지를 제고해 갔다. 특히 대가제(代加制)에 의거해 형제들이 산계로 정5품 통덕랑 품계를 확보하고 있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양자영입도 일상화 되어 있으며, 문중의 족보편찬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부계 친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구축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남편 최창익은 소박하고 포용력을 갖춘 성품으로 수묵화에 능통하였다. 부인은 남편의 잠교(箴敎)로 성리학적 소양을 쌓아갔다. 즉 남편은《소학(小學)》과《내칙(內則)》을 언문(諺文)으로 필사하여 부인에게 제공하였고, 부인은 이를 고람하면서 부학(婦學)과 부덕(婦德)을 쌓아갔다. 또한 비록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부인을 고향인 경기도 양·광주(楊·廣州)로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렇듯 전주이씨는 남편의 배려 속에서 장남부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혼인한 지 12년 만에 1남 1녀를 두어 단혼직계가족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최씨 일가는 양양 위천(渭川) 상하방(上下坊)의 동족마을에 정주하였다. 최씨 일가의 경제적 기반은 일정하게 농토와 노복(奴僕)을 소유하여 노비노동력을 이용한 소농경영이었다. 장산의 규모는 확인되지 않으나 노복은 1가족 5구를 소유하였다. 가족들의 식량이 모자라는 형편이었으나 가용을 위해 판곡(販穀)을 하였고, 노복들은 임노동을 하였다. 이점은 최씨 일가의 소농경영이 불안정한 상태였음을 시사한다. 즉, 산계로서 정5품 상계인 통덕랑 품계를 확보한 일가였지만 소농경영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이에 동족마을에서의 생활은 불안정한 경제적 기반을 보완할 수 있는 생활구조로서 의미를 갖는다.



3. 미망인의 생활자세


전주이씨는 결혼 한 지 17년 만에 미망인이 되었다. 이른바“관동대렴(關東大斂)”으로 명명된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집안의 가산을 탕실(蕩失)하였고 전염병으로 남편과 장남을 잃었다. 이로서 부인은 어린 남매를 양육하고 극빈한 가사 전반을 꾸려가면서 무려 33년 동안 미망인의 삶을 영위하였다.
미망인의 생활일상으로서 먼저 주목되는 점은 인리친척간의 관계설정에서 살필 수 있다. 즉 대소사를 막론하고 집안의 일은 일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가솔들을 단속하며, 인리와 친척을 막론하고 경연(慶宴)같은 호화스럽고 소리 내어 웃고 즐기는 자리는 기피하였으며, 친척간의 서문(書問)과 정례(情禮)에 명분이 엄정하고 규모가 절연(截然)하였으며, 빈궁한 생활에서도 도울 수 없으면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생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설정은 자기 처신의 관리, 집안 가솔의 단속적 성격이 짙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성격은 수신이 강조되는 시대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며, 여성의 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자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전주이씨의 이러한 생활 자세는 미망인으로서 보다 철저하고 엄격하게 이행하였다는 데 그특성이 있다. 호화언소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피하는 생활 자세는 만년에 이르도록 한결같았다고 하며, 비록 매우 빈한한 상황에서도 친인척의 두곡의 도움마저도 전혀 반기는 기색이 없이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미망인의 이러한 생활 자세는 일견 매우 폐쇄적인 성향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서문과 정례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명분과 규모가 절연하고 엄정한 자세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점에서 전주이씨의 미망인으로서 삶은 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원천은 문자 활동에서 시사되듯 성리학적 소양을 터득하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미망인의 생활일상에서 주목되는 점은 봉제사(奉祭祀)이다. 봉제사는 접빈객과 함께 이 시기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지만, 미망인의 생활에서 봉제사는 그 본연의 기능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전주이씨는 양부모와 남편의 제사를 기일(忌日)과 절일(節日)에 받들고 있다. 그리고 친정부모의 제사는 기일제만 간소하게 받들고 있다. 부계친족중심의 가족구조에서 시가(媤家)의 제의는 예제(禮制)로 체화되어 있으며, 친부모 제의는 정의(情誼)에 따른 자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자손이 한미하여 예제를 갖추지 못하고, 살림이 빈한하여 풍성한 제수를 마련하지 못하는 것에 강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더욱이 시부모를 한번도 뵙지 못하고 봉양하지 못하였다는 사실과 딸자식으로서 친부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사실로 강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祭酒)만은 맑고 단것으로 확보하여 치제하였으며, 제실은 손수 소제하였고, 제수 역시 손수 노작하였고, 제일에는 한숨도 눈을 붙이는 일 없이 곡을 하는 것으로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은 만년에 이르도록 한결같았다. 이렇듯 전주이씨는 미망인으로서 봉제사 의식이 남다르게 강렬하였다는 데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남편의 유지와 미망인의 성숙된 효 의식, 그리고 체화된 성리학적 소양에 따른 가계계승의식이 그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미망인의 생활일상에서 주목되는 점은 노복의 관리이다. ‘관동대렴’으로 인자한 아비라도 그 자식마저 보호하기 어려운 지경에서도 부인은 아침 저녁의 전죽(●粥)에서 반드시 먼저 2~3홉을 덜어서 가솔들 몰래 노비 가에 보내어 2년 동안 함께 보명(保命)하였다. 그리고 노비가 자식을 낳으면 함께 유양(乳養)하였다고 할 정도였지만, 만년에 이르러서도 장성한 남자 노비들을 내어 보내고서야 뜰 안마당을 소요(逍遙)하였고, 비록 소해(小奚)라고 하더라도 방에서 시식(侍食)하지 못하게 하여 내외의 구분을 엄격하게 이행하였다.
이렇듯 노복을 대함에는 은혜와 위엄을 겸하였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로서 노복들은 충성을 다하였고 심지어 농시에 고용활동을 하면서 오엽(午●;들밥)을 주인 집 남매를 위해 들여보내기까지 하였다. 은혜와 위엄을 함께 갖추는 것은 보편적인 행동양식이었지만 부인은 미망인으로서 보다 엄격하게 이행하였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4. 미망인의 자녀교육


전주이씨의 자녀교육에 대한 의식은 매우 강렬하였다. 자녀교육은 어미의 마땅한 도리라는 보편적 의식을 가졌고, 여기에 미망인으로서 자식의 선교(善敎)를 당부한 남편의 유지를 받드는 의미와 아들의 입신출세를 통해 남편의 사망으로 영락(零落)해진 일가의 번창을 도모하겠다는 의지가 겹쳐지면서 그 의식은 매우 강렬했다.
전주이씨는 어린 자녀에게 선한 심성과 효·가계계승의식을 키우려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언(俚言)은 입에 담지 말며, 오언(惡言)은 남에게 하지 말며, 미물의 원소(●巢)라도 훼손치 말며, 미물이라도 혈류(血類)는 상하게 하지 말며, 잡기(雜技)는 근접치 말며, 식탐(食貪)을 자제하라. 이러한 규제는 근원적으로 악을 배척하고 선을 향하게 하는 생활자세로 귀결된다. 그리고 선친의 수적(手蹟)과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물건들을 소중히 다루도록 하여 효와 가계 계승의식을 키우고, 서책을 경건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편간(片簡) 파지(破紙)까지도 유월(踰越)하지 못하게 하여 학문하는 자세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아들이 11세 되던 해에 종부(從父) 교관(敎官) 공(公)이 운영하는 학당에 보냈다. 이것은 귀농(歸農)과 구별되는 학문의 길로 접어 든 것으로 인식되면서 전주이씨는 아들에게 정성을 다하면서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빈한한 살림에도 반드시 조반을 챙겨서 보냈고, 쇠를 녹이고 솜이 부러질 것 같은 한서(寒暑)에도 혹여 중도에서 유랑할까 걱정하여 동산에 올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곤 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받아온 일과(日課)는 경사(經史)를 막론하고 연송(燃松)해 놓고 강학(講學)하도록 하였으며, 함께 자리하여 계구(戒懼)와 탄상(歎賞)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한편 교우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친구를 새로이 사귐에는 반드시 그 인물의 현부(賢否)를 물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속언(俗言)과《소학》의“취우필단(取友必端)”을 강조하여 막연하게 친구를 쫓아다니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특히 전주이씨는 과경(科慶)에 집착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백일장(白日場)에 임해서는 지필묵(紙筆墨)을 챙겨 일찍 출발토록 독려하였고 종일토록 참방(參榜)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과거에 임해서는 수차례에 걸쳐 반비(盤費)를 마련해 주면서도 구차한 얘기를 한 적이 없으며, 3일 전부터 재계하고 축원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자녀교육에는 늘 단장(端莊)하고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였고, 미망인의 자식이기에 익애(溺愛)를 경계하여 자애로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취할만한 행동에는 칭찬으로 권면하였고, 과실에는 정색(正色)하고 엄하게 문책하고 달초(撻楚)로 엄히 규제하였다. 독서하기에 염증을 내면 가업의 흥망성쇠가 자신의 일신에 달렸음을 각성시켰고, 지행(知行)이 이루어지지 않는 학문은‘불여귀농(不如歸農)’이라 하여 자의식에 의거해 반성을 촉구하곤 하였다.



결론


이상에서 전주이씨의 생애와 삶의 내력을 살펴보았다. 전주이씨는 어린시절 부친이 사망하고 외가댁에 이접한 성장환경으로 계실(繼室)로 혼인하였지만, 결혼초기에 소광한 성품으로 수묵화에 능통했던 남편의 잠교(箴敎)로 터득한 문자생활은 그의 생애 전반을 규정하고 있다. 비록《소학》이나《내칙》과 같은 생활 지침서였지만, 부인은 평생토록 이 서책들을 고람하고 궁구하면서 성리학적 부덕과 부학을 터득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을 쌓아 갔다.
전주이씨의 시가(媤家) 일족은 3대에 걸쳐 출사자(出仕者)를 배출하면서 대가법(代加法)에 의거해 동생형제(同生兄弟)들이 산계(散階)로 통덕랑(通德郞) 품계를 확보하고, 양자를 영입하여 가계를 계승하고 동족마을을 이루어 전형적인 부계 친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회적 입지를 제고해 갔다. 그러나 단혼 직계가족을 이루어 동족마을에 정주한 전주이씨의 생활은 노비노동력을 이용한 소농경영이었으며, 친족집단의 번창과 남편의 산계에도 불구하고 소농경영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전주이씨의 일상은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생활전반에 걸쳐 명분과 규모가 엄정하고 절연한 삶이었다. 가사노동, 가정관리, 봉제사, 자녀교육, 노비관리, 친인척관계 등에서 투영되는 이러한 생활자세는 성숙한 성리학적 삶이었으며, 그것은 단아하고 정숙했던 성품과 성리학적 부학(婦學)과 부덕(婦德)을 갖춘 소양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비록 학문적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성리학적 가치와 질서에 대한 이해가 생활의 기저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자세는 미망인이 되면서 한층 엄격해 지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미망인의 이러한 생활 자세는 일견 폐쇄적이고 피동적인 생활자세로 비추어 질 수 있지만, 친인척 간의 서문(書文)과 정례(情禮)의 적절하고 곡진함에서 나타나는 생활 자세는 자존의식에 입각한 보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주이씨의 생애는‘여중군자(女中君子)’로 평가되고 있다. 이 평가는 여성의 전형은 아니더라도 그 모범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이다. 그리고 그 모범성은 전주이씨의 순종적·종속적 생활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명분과 규모가 엄정하고 절연했던 보다 주체적·능동적 생활 자세에 대한 평가였다. 이러한 양상은 비록 18세기가 부계 친족중심의 사회질서가 구축된 사회였지만, 여성들의 생활일상에서 순종적·종속적 생활자세가 평가받는 사회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