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11월 - 국군의 날은 6·25전쟁 때 양양지역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10월 1일로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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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04회 작성일 2020-02-0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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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국군의 날은 6·25전쟁 때
양양지역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10월 1일로 정하다.



1. 북한의 남침준비


양양은 8.15해방 후 소련에 점령당하였고 현남면과 서면 일부만 남한에 속하게 되었다.
1948년 김일성은 수상으로, 남조선노동당지도자 박헌영을 부수상으로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후 남침을 준비하기 위하여 김일성은 소련, 중국과 군사비밀협정을 맺어 소련으로부터 탱크와 비행기 등 최신 무기를 도입하고 중공으로부터는 중국군에 참여하였던 조선의용군(화북지방에서 일본과 싸웠던 중국군 제팔로군)2~3만명을 지원받아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2. 북한군의 이동과 부대배치


북한군 제5사단은 함경남도 나남에서 동해북부선 기차를 이용하여 6월 20일 양양에 도착하였다. 북한군 제 5사단은 조선 의용군출신으로 중공군에 편입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던 전투경험이 많은 사단이었다.
탱크는 남대천 아카시아 숲속에 감추어 두고 기마부대는 양양중고등학교에, 포병부대는 양양도서관 자리에 주둔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남침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3. 6.25당시 남한의 상황


영동지방경비는 제8사단이 맡고있었는데 1949년 6월20일 제10연대와 21연대를 기간으로 강릉에서 창설된 부대로 현북면 기사문리에서 흑진동(인제)까지 26km를 담당하고 있었다. 병력은 6,866명으로 경비 구역이 넓어 군인2~3명에지방마을청년들이보조하여경계하고있었다.
1950년 6월 24일에는 전국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육군참모총장이하 국군의 고위간부들은 저녁 6시부터 서울 용산국군회관 낙성식파티에 참석하여 일요일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고 8사단에서도 교육을 위해 포대장, 선임하사급은 대부분 포병학교에 파견 중이었고 대대장도 육군본부에 출장 중이고 부대원은 농촌모내기 도우라고 2주간 휴가를보냈다. 이런 상황이니 새벽에 남침한 북한군을 막기에는 너무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4. 6.25전쟁 남침과 전투상황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사격과 더불어 북한군 주 공격부대가 현북면 기사문리 38도선을 돌파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하였고 또 다른 부대는 양양 영덕에서 서림지역을 공격하여 원일전리를 거쳐 남대천을 거슬러 강릉 소금강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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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8일 38도선을 넘어북으로 진경하는 국군행렬>



(1) 잔교리 전투


국군 8사단 10연대 제2대대가 담당한 이 지역은 24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경계진지주변의 시계가 매우 불량하였다. 잔교리 188고지에 포격이 시작되자 경계하던 제2대대는 전열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혼란의 회오리 속에 말려들었다.
04시35분에야 북분리 제7중대장으로부터‘적의 공격이 개시했다.’는 급보가 왔다. 곧 이어 제5중대, 제6중대장으로부터 급박한 전황 보고가 잇따르자 이후 연대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져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인구리 주민들의 피난을 도우면서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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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를 향하여 포격을 실시하는 유엔군>



(2) 정족산 -진흑동의 전투


이 지역은 제8사단 제10연대 1대대가 경계하던 지역으로 북한군 제1경비단이 서림리 제9중대 정면을 공격하여 왔다. 9중대는 적과 교전중 중대장이 중상을 입고 적의 포대 공격이 집중되면서포위당하자분산된체철수하였다. 제6중대도분산되어철수하였다.


(3) 명지리 일대의 전투(제8사단 10연대 5중대 제2소대장 이홍진 중위 증언)


1950년 6월25일 우리 소대는 명지리 일대를 새벽4시 자고있는데 포격소리에 깨었더니 282고지에 포탄이 비오듯 쏟아진다는 보고였다. 133고지로부터 적이 새까맣게 공격해 온다는 것이였다. 20명의 예비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며 어성전중대장에게 보고하였다. 05시에 적은 벌써 133고지를 탈취하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30여분간 일진일퇴를 벌였는데 실탄이 거의 바닥나 후퇴하였다. 장리의 제3소대와 통신이 두절되었으나 나중에 어성전리에서 합세하였다.



4. 유엔군의 참전


1950년 6월 26일 4시(미국 25일 오후 2시) 유엔 안보리에 소집되어 북한군의 진격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하고 6월 29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지상군 투입과 38도선 이북 군사시설 폭격을 명령하였다. 7월 1일 미군 선발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고 7월 5일 오산에서 첫 교전을 치루고 7월 7일 유엔이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요구하여 미국을 비롯한 호주, 캐나다, 등 16개국이참전하게 되었다. 8월 초(전쟁 47일차)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1일(전쟁 48일차) 포항에서부터 북한군을 섬멸격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0년 9월15일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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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돌파하는 국군(1950)>



5. 양양 기사문리 38선 돌파한 날이 국군의 날


1950년 9월29일 국군 제3사단은 삼척을 점령하고 9월30일 38도선상의 인구리에서 멈추고 북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토통일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고 침략자를 격멸하고 통일을 달성해야 할 한국 국민의 권리가 있다고 그의 신념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UN군 사령부는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다음날 모든 부대는 진격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국군도 38도선인 인구리에 정지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38도선을 돌파해 북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정일권 총장은 UN군과의 지휘체계상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미국의 워커장군에게 동해안 전선의 전술적인 상황하에서 38도선 바로 북쪽의 고지를 점령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해 동의를 얻었다. 그리하여 국군 제1군단장은 9월 30일을 기하여 제3사단은 현재까지의 추격을 계속하여 38도 이북의 양양을 점령하라는 작전명령 제109호를발하였다.
1950년 10월 1일 05시 경 제3사단 23연대를 선봉으로 북한 인민군 제5사단의 저항을 제압하고 역사적인 38도선 이북지역의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날 10시경 양양을 탈환하였다. 전쟁이 시작한지 99일만의 일이었다. 정부는 이날을 기념하여 1956년에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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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돌파(19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