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양양의 사림사지(沙林寺址)에 얽힌 두 번째 설화(을사포락/乙巳浦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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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沙林寺의 廢寺를 記錄으로 본 推定
① 동국대학교 문명대교수가 단장이 되어 1985년`~1986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사림사(선림원)의 금당(金堂)과 조사당(祖師堂)이 함께 매몰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발표[禪林院本尊佛像問題와 石毘盧遮那佛像의 硏究25쪽]한 바 있으나,
② 이에 대해 고려사를 중심으로 사찰의 창폐증축(創廢增築) 등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이를 뒷밭침할 만한 전거를 발견치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③ 정영호 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은 양양군지(702쪽) 불교 편「선림원의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대조를 이룬다.
…“고려일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폐사된 후 다시 중창불사가 크게 있지는 않았었던 것같다. 다만 옛 석탑이 서 있고 석등, 석조부도, 석비 등 옛 사찰의 유적유물이 있으므로 승려들이 개인적인 수행도량을 짓고 등촉을 밝혔을 것이 아닌가 한다. 현지에서 수습되는 조선시대의 기와, 자기, 토기 등 여러 파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④ 1491년부터 매월당 김시습이 출가하여 양양에 다년간 기거하면서 사림사를 방문하여 사림사비문을 확인하고 왕우군(왕희지)의 글자를 모아 쓴 것이라 하였으니 그 당시는 폐사되기 전이라 보아지며,
⑤ 양주읍지(襄州邑誌, 1823년)와 양양 현산지(襄陽峴山誌, 1911년) 사찰 편에 사림사는 부 서쪽 40리 서림의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여졌다.
기묘년(1819년/1759년) 6월에 서림 사람이 바위 낭떠러지에서 쇠 사발과 대나무 하나를 얻었는데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고 했다.
⑥ 1747년 양양부사 안경운(安慶運)이 홍각선사비의 잔편을 수습하여 부의 창고에 간직하였다는 기사[襄州邑誌·峴山誌의 古蹟조, 江原道誌의 碑版조]로 보아 1747년 이전에 당사가 폐사된 것이라 보아진다.
⑦ 1747년 이전 양양지방의 천재지변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근간으로 검색한바 1605년(을사) 포락이 너무 혹심한 재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양양지방에 을사포락과 같이 지형을 바뀐 포락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때 산사태로 폐사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옛날 어느 해 여름날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쏟아지는 폭우와 폭풍 속 어느 날 밤에 수많은 승려가 걱정스레 요사채에서 합장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경내 뜰에 대호(大虎) 한 마리가 나타나 들뛰면서 들볶으므로, 수장 스님께서 염불을 멈추게 하고서는“대호가 저렇게 날뛰니 무슨 변고일까? 이는 예사가 아니요, 누구를 데려가려고 저러는 것이 분명하니 어찌하면 좋겠소?”중의를 모으니 스님들모두가 입을 맞춘 듯“수장 스님부터 차례로 한 분씩 밖으로 나가 봅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무릅쓰고 스님들은 수장 스님부터 차례로 모두 나갔으나 대호는 여전히 들뛰며 볶아댄다.
이상히 여겨 인원을 점검하니 한 분의 스님이 보이지 않아 찾아본즉 요사채 주방에서 저녁을 마친 설거지를 하는 스님이 있어 나오라 하였다.
주방 담당 스님은 손도 닦지 않은 채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마당으로 나오니 대호는 순간 그 스님을 덥석 물고 휙 장대 같이 퍼붓는 빗줄기 속을 날아가듯 어둠 속을 가르는데, 지진인가 벼락인가 ‘쾅 우르르 광 쾅’어두운 밤 산을 쪼개듯 부수듯 뒤흔들 드니 높은 뒷산이 절개되어 삽시간에 절간을 덮쳐버렸다고 한다.
【영혈사 주지 홍선 제공】
「양양(襄陽)은 부내(府內)의 백여 호의 대 소 인가가 재산과 가축이 일시에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 형제 온 가족이 물에 빠지거나 산사태에 압사하여 여염거리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해변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襄陽則府內百餘戶大小人家財畜, 一時漂沒, ●死人物, 或父母子女, 或夫妻兄弟, 有全家淪溺者, 有沙汰壓死者, 閭閻街路, 哭聲徹天, 濱海之間, 積斃相枕.」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을사(1605) 7월 23일(을미) 기사】
<한빛문화재단 정밀발굴조사팀이 발굴한 옥개석 사진 뒤에 보이는 보물 제447호인 승탑(부도)은 당초에는 현 위치에서 뒤편으로 약 50여m의 산 중턱에 도괴된 채 산재한 부재들을 수습하여 1965년 기단부만 복원해 놓았었다. 따라서 이 승탑의 상층부를 덮고 있었던 옥개석은 사림사의 폐사동기가 된 산 사태당시 당초 승탑이 있었던 원 위치에서 약 80여m까지 떠밀려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을사(1605) 7월 23일(을미) 기사
<襄陽則府內百餘戶大小人家財畜, 一時漂沒,●死人物, 或父母子女, 或夫妻兄弟, 有全家淪溺者, 有沙汰壓死者, 閭閻街路, 哭聲徹天, 濱海之間, 積斃相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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