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2호

11월 - 양양의 사림사지(沙林寺址)에 얽힌 두 번째 설화(을사포락/乙巳浦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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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50회 작성일 2021-02-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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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沙林寺의 廢寺를 記錄으로 본 推定
① 동국대학교 문명대교수가 단장이 되어 1985년`~1986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사림사(선림원)의 금당(金堂)과 조사당(祖師堂)이 함께 매몰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발표[禪林院本尊佛像問題와 石毘盧遮那佛像의 硏究25쪽]한 바 있으나,
② 이에 대해 고려사를 중심으로 사찰의 창폐증축(創廢增築) 등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이를 뒷밭침할 만한 전거를 발견치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③ 정영호 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은 양양군지(702쪽) 불교 편「선림원의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대조를 이룬다.
…“고려일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폐사된 후 다시 중창불사가 크게 있지는 않았었던 것같다. 다만 옛 석탑이 서 있고 석등, 석조부도, 석비 등 옛 사찰의 유적유물이 있으므로 승려들이 개인적인 수행도량을 짓고 등촉을 밝혔을 것이 아닌가 한다. 현지에서 수습되는 조선시대의 기와, 자기, 토기 등 여러 파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④ 1491년부터 매월당 김시습이 출가하여 양양에 다년간 기거하면서 사림사를 방문하여 사림사비문을 확인하고 왕우군(왕희지)의 글자를 모아 쓴 것이라 하였으니 그 당시는 폐사되기 전이라 보아지며,
⑤ 양주읍지(襄州邑誌, 1823년)와 양양 현산지(襄陽峴山誌, 1911년) 사찰 편에 사림사는 부 서쪽 40리 서림의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여졌다.
기묘년(1819년/1759년) 6월에 서림 사람이 바위 낭떠러지에서 쇠 사발과 대나무 하나를 얻었는데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고 했다.
⑥ 1747년 양양부사 안경운(安慶運)이 홍각선사비의 잔편을 수습하여 부의 창고에 간직하였다는 기사[襄州邑誌·峴山誌의 古蹟조, 江原道誌의 碑版조]로 보아 1747년 이전에 당사가 폐사된 것이라 보아진다.
⑦ 1747년 이전 양양지방의 천재지변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근간으로 검색한바 1605년(을사) 포락이 너무 혹심한 재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양양지방에 을사포락과 같이 지형을 바뀐 포락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때 산사태로 폐사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 沙林寺의 廢寺설화
옛날 어느 해 여름날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쏟아지는 폭우와 폭풍 속 어느 날 밤에 수많은 승려가 걱정스레 요사채에서 합장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경내 뜰에 대호(大虎) 한 마리가 나타나 들뛰면서 들볶으므로, 수장 스님께서 염불을 멈추게 하고서는“대호가 저렇게 날뛰니 무슨 변고일까? 이는 예사가 아니요, 누구를 데려가려고 저러는 것이 분명하니 어찌하면 좋겠소?”중의를 모으니 스님들모두가 입을 맞춘 듯“수장 스님부터 차례로 한 분씩 밖으로 나가 봅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무릅쓰고 스님들은 수장 스님부터 차례로 모두 나갔으나 대호는 여전히 들뛰며 볶아댄다.
이상히 여겨 인원을 점검하니 한 분의 스님이 보이지 않아 찾아본즉 요사채 주방에서 저녁을 마친 설거지를 하는 스님이 있어 나오라 하였다.
주방 담당 스님은 손도 닦지 않은 채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마당으로 나오니 대호는 순간 그 스님을 덥석 물고 휙 장대 같이 퍼붓는 빗줄기 속을 날아가듯 어둠 속을 가르는데, 지진인가 벼락인가 ‘쾅 우르르 광 쾅’어두운 밤 산을 쪼개듯 부수듯 뒤흔들 드니 높은 뒷산이 절개되어 삽시간에 절간을 덮쳐버렸다고 한다.
【영혈사 주지 홍선 제공】
 
이렇게 하여 사림사는 사라졌는데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나 참혹하다.
「양양(襄陽)은 부내(府內)의 백여 호의 대 소 인가가 재산과 가축이 일시에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 형제 온 가족이 물에 빠지거나 산사태에 압사하여 여염거리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해변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襄陽則府內百餘戶大小人家財畜, 一時漂沒, ●死人物, 或父母子女, 或夫妻兄弟, 有全家淪溺者, 有沙汰壓死者, 閭閻街路, 哭聲徹天, 濱海之間, 積斃相枕.」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을사(1605) 7월 23일(을미) 기사】
 
이 설화에서 의문이 한 가지 생기는바 대호는 산이 무너지려는 천기(天機)를 알고 물고 간 스님을 살리려 한 것인가? 먹이로 한 것인가? 대호인가? 산신령인가? 신비스럽기만 설화가 전해진다.
 
 
사림사지(선림원지) 발굴현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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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27일~2016.11.20일 까지 (재)한빛문화재연구소의 정밀발굴조사 모습.>
 
 
승탑 옥개석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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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문화재단 정밀발굴조사팀이 발굴한 옥개석 사진 뒤에 보이는 보물 제447호인 승탑(부도)은 당초에는 현 위치에서 뒤편으로 약 50여m의 산 중턱에 도괴된 채 산재한 부재들을 수습하여 1965년 기단부만 복원해 놓았었다. 따라서 이 승탑의 상층부를 덮고 있었던 옥개석은 사림사의 폐사동기가 된 산 사태당시 당초 승탑이 있었던 원 위치에서 약 80여m까지 떠밀려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을사(1605) 7월 23일(을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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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陽則府內百餘戶大小人家財畜, 一時漂沒,●死人物, 或父母子女, 或夫妻兄弟, 有全家淪溺者, 有沙汰壓死者, 閭閻街路, 哭聲徹天, 濱海之間, 積斃相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