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2호

10월 - 양양의 사림사지(沙林寺址)에 얽힌 미천골(米川谷)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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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28회 작성일 2021-02-2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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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에는 아주 넓은 사림사의 옛 절터가 있는데, 그 사림사의 창건, 규모, 폐사의 원인, 시기 등의 기록은 없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한 여러 지리지와 고문헌에는‘사림사는 양양부 서쪽 30~70리에 있으며 사림사 내에 선림원이 있었으며, 그곳에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가 있고 지금은 폐사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폐사된 유허지에는 삼층석탑(보물
444호), 석등(보물445호), 홍각선사탑비(보물446호), 부도(보물447호)만 남아있으며 더 귀중한 자료는 1948년에 이 절터에서 출토된 사림사범종의 내부 기문이다.

 
<사림사 범종의 내부 기문>

『貞元廿年甲申 三月 廿三日 當寺鍾成內之古尸山郡仁近大乃末紫草里 施賜乎 古鍾金 二百八十廷當寺古鍾金二百廿廷, 此以本爲內·····』
『정원이십년갑신 삼월 이십삼일 당사종성내지고시산군인근대내말자초리 시사호 고종금 이백팔십정 당사고종금 이백이십정, 차이본위내 ·····』
 
<사림사 범종 명문 해석>

【번역】
『정원 20년 갑신(804) 3월 23일에 당사의 종이 이루어지다. 고시산군의 인근 대내말과 자초리가 시납하신 옛 종의 쇠 280정과 이 절의 옛 종의 쇠 220정, 이것으로 밑천을 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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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골(米川谷) 사림사지(沙林寺址)>
 

【부연/敷衍】
신라 애장왕 5년인 804년에 옛 종 쇠 280정과 당사의 옛 종 쇠 220정을 밑천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804년 이전 퍽 오래전에 사림사는 창건되었다라고 추정된다. 이 범종도 월정사에 옮겨졌다가 6·25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사진으로밖에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 잔해는 현재 국립춘천박물관 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
파손된 문화재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으나 이 절에 얽힌 두 가지의 설화만은 영원히 구전으로 이어져오는데 우선 첫 번째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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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탱크 시설정원이십년명 신라범종 (貞元廿年名 新羅梵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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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소실된 범종>
 
 
사림사가 있던 골을 미천골이라고 일컫는 설화
사림사에서는 날마다 범종소리와 이천여 명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미천골에서 일어나 설악산 남쪽 기슭에 메아리치는 불교의 성지였다. 당시 나라에서는 어찌나 스님들이 그렇게 많았으며 어떻게 이곳으로 향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모여졌는지 놀랐다. 이곳 산골 사람들은 스님들로부터 불교에 귀의하는 보람을 느끼는 반면 시달림도 산같이 높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 중수원이 100 리나 되는 가장 긴 양양 남대천의 지류는 셋으로, 하나는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본류와 다음 하나는 후천으로 구룡령에서 발원하는 서림천과 또 하나는 설악산 대청봉에서 발원하는 오색천으로 이셋이 합류하여 큰 하천을 이루어 동해로 유입하는데 남대천의 하구를 항개목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림사에서 아침저녁에 스님들의 공양을 위하여 씻은 쌀뜨물이 사림사 절 계곡의 미천골에서 시작하여 서림천과 합류하여 70리 물길 따라 흘러 항개목 까지 부옇게 하루 두 번씩 물 들였다한다.
몇 섬의 쌀을 씻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의심스럽기는 하나 이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미천골 이라는 지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것에 연유하여 사람들은 사림사가 있던 계곡을 이천여 명 스님의 공양미를 씻은 시내라는 뜻으로 미천골[米川谷]이라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해진다.
이는 사림사의 옛 절의 규모도 헤아릴 수 있는 역사와 지리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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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梵鍾) 내부의 기문(記文)>